

한 해의 황금
겨울, 한 해의 끝. 한 해의 종착점은 누구나 다르다. 그 끝에 선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루미네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종착점은 리월이었다. 안수령이 철폐되고 난 후 몇개월이 지난 어느 겨울, 루미네는 이나즈마보다 리월의 겨울을 택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간단하다.
'슬슬 종려 씨의 생일이네. 올해는 뭘 선물해야할까.'
오늘은 12월 30일. 루미네는 지난 종려의 생일을 돌아보았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리월의 갖가지 특산물을 모아다 꽃다발을 만들었다. 종려는 그때도 정말 기뻐했지만 올해는 그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를 테면 놀란 모습 말이다.
루미네의 상상 속 그의 모습은 언제나 비슷했다.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의 진지한 표정, 이따금씩 보여주는 단아한 미소, 루미네가 리월을 떠날 때에는 드물게 걱정스런 표정도 보여주었지만 기본적으로 종려는 루미네와 함께 있을 때면 평소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루미네는 퍼뜩 리월을 떠날 때 종려가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쇄국을 돌파할 방법을 생각해 봐. 네가 이나즈마에 가서 어떤 여정을 하게 될 지 나중에 다시 만나면 꼭 듣고 싶군.'
루미네는 오랫동안 못 본 사람의 생일 축하 겸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리월 거리를 걸으며 생각해보며, 요리를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루미네는 결론 내렸다.
'이나즈마에 갔으니 이나즈마 요리를 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나즈마 음식은 종류가 꽤 많아. 전부 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종려 씨의 취향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어.'
루미네는 곧장 만민당으로 향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만민당에는 아침 식사를 포장해가는 손님 몇몇을 제외하고는 한산했다. 루미네는 주방에서 못 보던 요리들을 여러 개 만들고 있는 향릉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안녕 향릉. 신 메뉴를 개발 중 인가봐?"
국자로 국물을 한 모금 양으로 퍼서 작은 그릇에 옮겨 담던 향릉이 뒤를 돌아보았다.
"와, 루미네 잖아! 얼마만이야! 리월에 돌아왔구나?"
반갑게 루미네를 맞이하는 향릉이 좋은 때에 왔다며 국물이 담긴 작은 그릇을 내밀었다.
"이거 이번 겨울 신 메뉴로 내볼까 하는데 맛 좀 봐주라.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
"알았어."
다짜고짜 내밀어진 그릇에 담긴 국물은 색부터 담백함이 느껴졌다. 한 모금 맛본 루미네가 작게 웃었다.
"진짜 맛있어. 분명 잘 팔릴 거야."
"정말? 휴, 다행이야. 이번엔 좀 과감한 도전을 했거든."
한시름 놓았다는 듯 긴장이 풀린 얼굴로 웃는 향릉에게 루미네가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로 국물 그릇을 내밀었다. 향릉은 그릇을 받아들고 불이 꺼진 냄비 옆에 놓았다.
"아침 시간대에 여기 오다니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어?"
"음, 종려 씨가 여기에 자주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
망설임 없이 향릉이 대답했다.
"맞아. 내가 있는 날엔 거의 점심이나 저녁 중 한번은 꼭 만민당에 오시거든. 종려 선생님의 입맛은 까다로운 편이니까 나름 인정받은 것 같아서 뿌듯해. 그런데, 그건 왜?"
향릉의 물음에 루미네가 향릉에게 몸을 바짝 다가가서는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했다.
"사실, 종려 씨한테 이나즈마 요리를 대접하려고 하거든. 근데 어떤 요리가 입맛에 맞을지 확신이 안 서서. 어떤 요리를 주문하는지 너한테 정보를 듣고 싶어서 왔어."
루미네는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줄 거란 정보도 말할지 망설였지만 이내 망설임을 접었다. 목소리를 낮춘 시점에서 향릉이 사정을 파악한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하, 그런거구나? 흠... 내 기억 속에서 종려 선생님은 만민당의 메뉴를 도장깨기 하듯이 주문하셔."
"도장깨기?"
루미네가 되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의 선에서 도장 깨기의 의미는 유명한 도장을 찾아가 그곳의 강자들을 한명씩 꺾는다는 의미였다.
"응. 일반적으로는 강자들을 차례차례 꺾어 정상에 올라선다는 의미지만, 적어도 요식업계에선 한 음식점에 있는 음식을 전부 먹어본다는 의미로 통해! 종려 선생님이 딱 그런 느낌이야. 만민당 음식들은 신 메뉴를 포함해서 전부 드시고 진지한 평가를 해주셔. 단순히 맛있다 혹은 맛없다로 일축되는 게 아니라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별로인지를 잘 찝어 주시거든. 그래서 다음 메뉴를 개발할 때 엄청 도움 돼."
향릉에 말에 루미네의 머릿속에는 만민당 음식들을 먹으며 고급진 그만의 언어로 평가하는 종려의 모습이 그려졌다. 반사적으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던 중 가게 밖에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루미네. 이나즈마가 널 더 성장시킨 모양이군."
어느 틈에 온 것인지 만민당 앞에 종려가 서 있었다.
"종려 선생님 안녕하세요! 뭐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괜찮네. 근처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서 잠시 와 본 것 뿐 일세."
종려가 루미네를 보며 말했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그 자리에서 루미네 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종려 씨. 이번 겨울은 리월에서 보내려고 왔어요.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루미네의 물음에 종려가 말했다. 이번엔 그 누구라도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물론이야. 시대가 변했어도 리월의 정취는 항상 변함이 없지. 너야말로 이나즈마의 쇄국을 뚫고 여정을 무사히 마친 모양이군.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알게 된 것 같아 기쁠 따름이네."
"종려 씨도 항상 변함없어서 솔직히 조금 안심했어요. 그럼 전 가볼게요. 이곳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요."
그렇게 말한 루미네가 향릉에게 인사하고는 만민당을 나왔다. 종려는 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왕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계에 돌아온 루미네는 거실에서 향릉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았다. 모든 음식들을 먹어보고 진지한 평가를 하며 입맛이 까다롭다는 것. 이것이 향릉의 말에서 도출해낸 정보였다.
"평범하게 '맛있는 음식'으로는 안 된다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루미네는 이내 어떤 이나즈마의 요리를 대접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를 굴렸다. 현재의 리월이 겨울인 만큼, 날씨에 맞게 따뜻한 음식이 좋겠다고 생각한 루미네는 순간 이나즈마에서 아야카와 토마와 함께 전골게임을 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건 게임이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전골을 만들어야겠어.'
전골에 필요한 재료는 두부, 각종 버섯, 양배추, 새우, 짐승고기, 새알 등이다. 루미네는 바로 보관한 식재료를 확인해 보았다. 필요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이렇게 만들면 그저 이나즈마의 정석인 전골이 나올 결말이 뻔했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은데.'
아무리 종려에게 이나즈마 음식을 대접한다지만 '평범하게 맛있는' 이나즈마 음식으로는 부족했다. 무엇인가 특별한 재료는 없는 것일까.
생각해보아도 답이 떠오르지 않은 채로 30분 정도가 흐르자, 루미네는 선계를 뒤로하고 나왔다. 거리를 돌아다니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리월의 거리는 항상 사람이 북적북적하지만 겨울에는 유독 다른 생기를 띠고 있다. 연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저마다 기쁨, 아쉬움, 보람, 즐거움과 같은 감정들이 섞여있어 다양한 빛깔을 머금고 있다. 이 빛들이 리월을 밝혀주는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루미네는 어느 새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항구에서는 리월인 뿐 아니라 타지의 사람들도 섞여있었고, 그들 또한 루미네처럼 한껏 리월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바다를 보며 한 해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 시장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있자면 추운 날씨임에도 따뜻한 기운이 몰려오는 듯 했다. 루미네는 그런 풍경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감상하듯 걸었다. 미술관에 온 관객이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관객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 그의 귀에 어느 단어가 들어왔다.
"황금 꽃게요?"
그 소리는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손 씨네에서 들려왔다. 루미네가 발걸음을 가까이 옮기자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래요! 겨울철 리월의 명물 하면 황금 꽃게 아니겠어요! 황금색 꽃게는 일반적인 꽃게보다 살도 더 통통하고 맛이 일품이죠! 저희 가게에 조만간 들여와서 팔 예정이니까 연말에 가족들 다 같이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겠네요! 한 번 먹어봐야겠어요."
손님과 손씨의 대화였다. 황금색의 꽃게. 살이 통통하고 맛이 일품... 메모지는 없지만 머릿속에 메모를 남기며 루미네는 그들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다.
"그럼 황금 꽃게는 어디서 구해오는 건가요? "
"녹화연못에 서식한다고 하더라고요. 희귀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리 어렵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을 거예요. 꼭 한번 사가 보세요."
루미네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 씨네 생선가게 쪽으로 다가갔다. 손 씨와 고 씨는 경쟁 업체였으므로 손 씨가 황금꽃게를 알고 있다면 고 씨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고 씨네 가게에 다가가자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귀에 들어왔다. 맛이 일품인 황금 꽃게, 녹화연못에 서식 중, 연말 기념 요리로 제격... 루미네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루미네가 지금껏 보았던 녹화 연못의 풍경은 생기가 넘치며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루미네가 서 있는 녹화 연못은 차가운 서리만이 가득 찬 곳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을 비추는 거울 같은 맑은 물은 얼어붙었고 곳곳을 수놓은 색색의 나무들은 가지만 남아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을 뿐이었다. 루미네가 없던 사이에 눈이라도 온 건지 눈까지 쌓여 있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뽀드득하고, 그리움에 우는 듯 한 소리가 났다. 형형색색의 녹화연못만 보다가 이런 새하얀 녹화 연못은 처음 보았지만 이런 모습이 있기에 내년 봄에는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임을, 루미네는 알고 있었다.
온통 얼어붙은 연못에서 꽃게를 찾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물이 맑아서 그런지 연못 안쪽이 보여 어느 곳에 꽃게가 있는지 눈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장갑을 끼고 가져온 도구로 얼음을 조심스레 부수고는 꽃게를 집어 든 루미네는 한 숨을 쉬며 고이 꽃게를 연못에 돌려보냈다. 벌써 이것만 30마리 째. 연못에 있는 꽃게는 전부 잡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종려의 생일을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위해 '특별한' 이나즈마 식 전골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하지만 루미네는 이 정도에서 포기할 성격은 못 되었다. 이나즈마에 간 이후로는 종려를 못 만난 지 꽤 되었으니 이 정도의 고생은 일종의 반가움의 표시로 생각하자고, 루미네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 말하고서는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다시 황금 꽃게를 찾아 나선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벌써 정오였다. 분명 생선 가게에서 있을 때만 해도 오전이었을 터인데, 맹목적으로 황금 꽃게만 찾아다닌 탓에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해가 가장 높이 있을 시간일 텐데 녹화 연못의 하늘은 해는커녕 구름만 가득했다. 루미네는 그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새로 잡은 꽃게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연못에 내려 놓았다. 허탕에 빠진 기운을 떨치기 위해 잠시 도구를 옆에 놓고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그의 어깨에 무엇인가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어느 틈에 그것은 물로 변해있어서, 루미네는 단숨에 눈임을 알았다.
눈은 점점 쏟아지기 시작하여 루미네가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황금 꽃게 찾기 작업에 돌입했을 때는 꽤나 쌓이고 있었다. 한참 얼어붙은 연못 표면을 부수고 꽃게를 들어 올려 확인 하던 차에 루미네의 등에 무엇인가가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누군가의 체온이 묻어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루미네는 어깨에 걸쳐진 그것에 손을 얹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익숙한 미소가 있었다. 루미네는 꽃게를 연못에 보내고는 장갑을 낀 손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이번에도 황금 꽃게는 아니었다.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루미네가 먼저 물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종려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건 기쁨 갖기도 슬픔 갖기도 했다. 루미네에게 걸쳐진 종려의 겉옷은 루미네에겐 컸음에도 쉽게 땅에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종려가 이내 말했다.
"오랜만에 널 만났으니 같이 얘기했으면 해서 말이야. 선계에 가서 널 찾던 중 부엌에서 식재료들을 보았어. 이나즈마의 요리재료인 것 같더군. 네가 없는 이유가 짐작이 가서 이곳에 왔지."
종려는 그렇게 말하며 루미네를 응시했다. 오랫동안 추은 곳에 서 있었던 모양인지, 귀가 살짝 빨개져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선계에 가서 너를 찾으러 나섰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종려는 말로는 이어지지 못할 독백을 삼켰다. 루미네는 종려의 겉옷의 옷깃을 잡아 제 쪽으로 더 끌어당기고는 말을 이었다.
" 종려씨도 황금 꽃게를 알고 있었던 거예요?"
종려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야. 황금 꽃게는 겨울 철 명물이라고 상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그의 말에 루미네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종려의 눈에는 그런 변화가 보였다.
"그 말은...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루미네의 물음에 종려가 일순간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답했다.
"역시 넌 예리하군. 맞아."
말을 더 이어하려던 종려는 루미네에게 꽃게 한 마리만 잡아주길 부탁하고는 서 있던 연못가을 벗어나 지면의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런 모습을 두 눈으로 쫓던 루미네는 이내 어렵지 않게 꽃게를 잡았다. 종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자 루미네는 그에게 잡은 꽃게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종려는 손에서 어떤 가루를 꽃게의 구석구석에 뿌렸다. 노란색을 띄고 있는 그 가루는 꽃게위에 뿌려지자 은은하게 빛나며 꽃게의 붉은색을 노랗게 바꾸었다. 그야말로 '황금 꽃게'다.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는 루미네에게 종려가 말했다.
"황금 꽃게의 정체는 콜 라피스 가루를 뿌린 꽃게라네. 지난번에 만민당에서 향릉이 콜 라피스 가루를 식용으로 가공해서 꽃게를 장식한 요리를 개발했는데 그게 상인들 사이에서 와전 된 것 같군."
"그렇군요..."
분명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었는데, 열의를 갖고 찾다보니 어느 순간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비록 황금 꽃게는 거짓이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나즈마식 요리를 대접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무언가가 분명 있음을 루미네는 생각했다. 애당초 그의 처음 목표는 종려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의 놀란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항상 보여주는 그 표정도 좋지만 더 다양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게 더 본질적인 이유다. 그런 생각을 하자 루미네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래 '특별한 요리'가 안된다면 '특별한 생일파티'로 만들면 돼.’
풀이 죽은 듯한 표정을 하던 루미네가 이내 평소의 시니컬한 표정을 되찾았다. 종려가 루미네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왜 황금 꽃게를 찾으려 했던 거지?"
그의 물음에 루미네가 웃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미소는 황금으로 빚어낸 장미 같아서,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오늘 저녁에 제 선계로 찾아오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는 종려의 손을 가볍게 잡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그가 자신을 주전자로 초대할 때마다 하는 동작이었다. 속세의 주전자의 흐린 안개에 둘려 쌓여 사라지는 루미네를 보며 종려는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는 루미네가 언제 한 모양인지 정중하게도 접어놓은 겉옷을 주워들었다.
"조금 있으면 날이 바뀌겠군."
종려가 중얼거리며 리월 항을 향해 발을 옮겼다. 어느 새 쌓이던 눈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여서, 그가 남긴 발자국이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종려가 루미네의 선계에 방문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리월을 떠나 이나즈마로 가기 전까지 루미네는 종종 종려를 초대해 같이 밥을 먹거나 옛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의 선계는 옛 서적에 나오는 무릉도원과도 닮아 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 잘 정리되어있는 정원. 곳곳을 장식하는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한껏 멋을 더해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가구가 적절하게 배치를 이루고 있어 얼마나 그가 고심했는지 느껴진다. 매번 똑같은 광경을 보는 것은 지루할 법도 했지만 한결같음에서 오는 편안함이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편안하다고, 종려는 루미네의 선계를 방문할 때마다 느꼈다. 하지만 오늘 종려는 자신 앞에 놓인 광경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의 앞에 놓인 선계의 광경은 예전과는 너무나 달랐다. 잔디밭이었던 땅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고, 붉게 물든 나무와 노란색을 한껏 뽐내던 나무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벚꽃나무가 있어 새하얀 눈밭 위에 제 흔적을 남기며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종려는 경치를 감상하듯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벚꽃은 이나즈마의 품종이군.’
지면에 그의 구두가 닿을 때마다 쌓인 눈이 그를 반기며 소리를 냈다.
‘이 눈은 드래곤 스파인에서 가져온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종려는 설원과도 같은 마당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루미네는 중앙에 놓인 큰 식탁에서 맛있는 소리로 끓고 있는 전골 옆에 그릇을 놓고는 종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맞춰서 왔네요, 종려 씨."
루미네가 평소와는 다른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 미소엔 만족, 기쁨, 보람, 즐거움과 같은 감정들이 묻어났다.
'내가 놀란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군.'
루미네가 자신을 위해 생일 선물을 줄 것이라고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선물'일 줄은 아무리 바위의 신이라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계약 외의' 일이었으니까.
루미네의 선계는 사시사철 노을 빛의 태양이 비추고 있어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웃음에 종려는 날이 바뀌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생일 축하해요. 종려 씨."
자정을 넘겨, 12월 31일이 돌아온 것이다. 종려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온화하고도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이 가득한 표정이다.
"정말 고맙네, 친구.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
자리에 앉은 종려를 따라 착석한 루미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전골을 그릇에 담았다.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둘에게는 너무나 많았다.
에필로그
천천히 흐를 것 같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어느 덧 둘은 이야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종려였다.
"왜 바닥에는 눈이 쌓여있는데, 나무는 벚꽃나무로 장식한 거지?"
벚꽃나무는 봄의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겨울에 만발하는 벚꽃나무라니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 현실성은 없었다. 그가 질문한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현실적인 루미네가 이렇게 설계한 이유를 지고한 바위 신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루미네는 이미 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뜸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다들 겨울은 한 해의 끝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겨울이 있기에 봄이 오는 것이죠. 겨울은 한 해의 끝이자 동시에 한 해의 시작을 준비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겨울의 눈이 있어야 봄의 벚나무가 만발 할 수 있어요."
종려는 그의 대답에 조용히 웃었다. 이 이상의 만족스러운 대답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온 시간은 길지 않지만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도 널 만난 것 이상의 행운은 없을 거야."
종려는 그리 말하고는 전골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고소하고도 담백한, 끝은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한 가지 요리에서 이리도 다양한 맛이 날 수 있는 것은 분명 식재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루미네가 만든 전골에는 비록 황금 꽃게는 없지만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임을 서로는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