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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니홍조
(雪泥鴻爪)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천리와의 전쟁은 결국 막을 내렸다. 많이 이들이 죽고, 다치고, 사라졌다. 실종된 이들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된 이들도,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이들도, 목숨을 건졌으나 삶의 이유를 잃은 이들도 모두 루미네는 보았다.

 

넌 여러 세계와 별바다를 넘나든 사람이야. 네 기억 속에 새긴 역사는 언젠가 너와 함께 다른 세계로 가겠지. 여행자인 네가 충분히 "기록"한다면, 티바트의 시대와 역사에 "살아있는 예비본"이 생기게 되는 거지.

 

끔찍한 경험은 어찌도 그리 선명하게 뇌리를 파고드는 것인지. 잊고 싶은 기억들은 끈질기게도 루미네를 쫓아왔다. 아직도 칼날 앞에 스러진 이들을 짓밟던 감각이 생생했다. 그 시체들을 발판 삼에 새로운 이들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또 다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았던 자신의 모습도 기억했으며, 바닥에 흥건한 핏물이 다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이의 핏물이 쏟아져 내려 갈라진 땅 위로 웅덩이지던 것 또한 기억했다. 번뜩이는 기억의 잔상 사이로, 진득한 선혈이 발 끝에 매달려 대지 끝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던, 선명하고 섬찟한 기억이 오랜 친구처럼 익숙한 손길을 뻗어 루미네를 옭아맸다.

가을은 다 지났건만, 낙엽을 닮은 울긋불긋한 시체가 가득했었더랬다. 지독한 악취를 몰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 끝에, 희뿌연 눈송이가 얼룩처럼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흩날려왔다. 그때의 루미네는 하얀 점들을 보고 나서야 겨울이 온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전쟁과 함께 맞이했던 겨울은 총 세 번. 죽음과 엇비슷한, 일 년의 끝에 찾아오는 겨울은 그리 반가운 날이 될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얼어붙는 숨을 가다듬으며 루미네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다. 붉고 또 붉었다.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 죽은 이들의 몸 위로 눈송이가 이불처럼 덮어온다. 멍이 든 죽음 위로 눈이 내렸다. 짙은 피비린내 사이로, 뺨에 내려앉은 눈송이의 서늘한 온도가 작은 그리움이 되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래도 루미네는 애써 그리움을 발밑에 묻고 피가 말라붙은 손에 힘을 주어 검을 들었었다. 그녀가 무너지면 안되니까. 그녀는 항상 강인해야 했으니까.

 

“저들은….”

 

과연 나를 용서할까? 죽음 위에 서 있던 루미네는 칼날 끝으로 흐르는 핏물을 바라보다, 그 핏물 사이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에 두 눈을 감았더랬다.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이 혀 끝에서 버석거리며 흩어졌다. 그대들은 날 용서할까. 이 죽음을 가져온 나를 용서할까. 내가 시작한 이 싸움을, 당신들은 용납할 수 있을까.

밤이 되면 그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왜 너희는 티바트에 와서. 너희 남매는 어째서, 우리의 안전하고 고요했던, 거짓 가득한 티바트에 와서, 왜, 왜, 왜…. 몰아치는 겨울바람 사이로 거칠게 갈라진 망자들의 목소리가 고통스러워 루미네는 못내 잠들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괜찮아, 루미네. 자네 잘못이 아니야.

 

아, 그래. 익숙한 당신의 목소리. 당신은 누구길래 자꾸 내 기억에서 멋대로 들쑤시고 다니는가. 그녀는 사라지는 기억의 파편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다시금 머릿속을 뒤지곤 했다. 나름 또렷이 기억한다 자부하는 이름들의 편린을 찾아다니니, 온통 고통 뿐이다. 다이루크? 아, 붉었던 사나이. 핏물 사이로 유독 찾기 어려워 나를 울게 했던 남자. 케이아? 속죄로 거짓을 짊어지던 사람. 붉었던 남자와 함께 사라졌던, 짙은 밤을 닮았던 남자. 벤티? 아, 흐르는 핏방울을 바람으로 날려주던… 바람이 되어 흩어져버린, 다시 바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몬드의 신. 라이덴…. 영원 같은 잠에 빠진 보랏빛 여인. 번개를 닮아 눈부셨었지. 타르탈리아. 전투를 사랑하던 그. 맞아, 작은 소년의 시신을 껴안고 소리 하나 없이 울던 그 사람. 푸른 눈 사이로 보이던 소리 없는 지독한 비명이 유독 기억에 남았던 그.

 

전쟁이 끝나면, 혼인식을 올릴까.

 

당신은 누구지? 루미네는 지끈거리는 머리 사이로 금빛을 쫓아 헤맸다. 누가 그랬더라, 유독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였는데. 온통 죽음 뿐이던 곳에서 두 새끼손가락을 서로 엮으며 미래를 약속했던 건 기억한다. 그 사람의 눈 색은 어땠더라. 찬란히 빛나는 금색이었나, 아니면 이따금 핏물 사이로 비치는 내 눈과 같은 호박색 눈동자였나. 어땠더라, 당신의 목소리는. 어두웠던가? 아니, 무거웠던가. 괴로워했던가? 어쩌면 행복했던걸 지도 몰라. 당신은 누구지? 이름이 뭐야, 나이는? 성격은 어땠는데? 당신은 신중한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바싹 말라 갈라져 가는 입술을 달싹이며 더듬더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찬란했던 그때로. 조각나 버린 기억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 아래에서도 추운 줄 모르고 웃는 모습이 어둠 속 흐린 호롱불처럼 아릿하게 빛났다.

루미네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긴긴 전쟁 끝에서, 애석하게도 온전하지 못한 건 몸뚱아리 뿐만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파편들을 매만지며, 루미네는 어쩌면 이 부서진 기억들이야 말로 그녀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온 살육의 대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사람들을 벤 그들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까, 루미네는 무거운 눈두덩이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차마 지키지 못해 칼날 사이로 스러지는 인연들을, 루미네는 못내 놓아주질 못했다. 그녀의 생각보다 전쟁은 더 잔인했고, 사람들은 추했으며, 본능이란 이성을 앞서는 무서운 것이었다.

본능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죽은 이들에 대한 마땅한 예의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난도질 된 채 바닥에 널브러진 차가운 이들의 몸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사라지지 않은 곳이 있다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었다. 망가진 이들의 시체를 보며 루미네는 대지의 살가죽 사이로 손톱을 박아 넣었더랬다. 알싸한 고통과 함께 피가 흐르는 새빨간 손으로 기억을 그러모으고, 부러져 가는 손톱으로 바닥을 기었다. 죽은 그들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모으고 싶었는데, 이미 예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망가져 있었다. 덜덜 떨리는 루미네의 손 끝에 모인 것은 결국 그들과 함께했던 추억 뿐이었다. 이 기억의 누구의 것인가? 다급하게 모은 탓에 각자의 추억들이 한 곳에 엉켜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감내할 수 없는 절망은 날카로웠다.

주르륵,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추억을 곱씹으며 루미네는 질척이는 절망의 수면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미련하다고 한들, 과거를 잃은 자가 어찌 미래를 꿈 꿀 수 있을까. 추억을 그리워하기에 기억을 들춰보는 것이 아니었다. 루미네는 살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이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되새겼다. 그녀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임도 있었다. 그녀마저 죽는다면, 그녀의 손바닥을 할퀴는 이 기억들은 누가 "기록"한단 말인가?

 

더 제대로 된 "기록"을 찾아야만 진실된 역사를 새길 수 있어. 석판에 새기면 기록은 오래 남지. 그러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반석이나 세상, 그리고 나 자신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지도 몰라.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누군지는 몰라도 그녀는 그와 약속했었다. 그런데... 왜 내 기억들은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을까? 당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도 지독하게 기억을 그러모았는데. 당신이 내게 부탁한 "기록"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싶었는데. 루미네는 흉터가 가득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일까, 우리는 무슨 사이였어?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기도하듯 읊조리며 텅 빈 시선을 돌려 망가져 버린 티바트를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까만 밤하늘에서 먼지 같은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황량한 땅 위에는 아직 채 치우지 못한 조각난 시체들 뿐, 살아있는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네, 루미네 혼자 속삭이는 목소리가 앙상한 나뭇가지 그림자 끝에 걸려 사나운 겨울바람에 거칠게 흔들렸다. 무엇인가 목구멍을 타고 울컥, 치밀어 올라와 울음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생각나지 않았다.

 

돌아가는 대로 혼인을 올리는 것은 어떤가? …겨울이면 안 될 거라고? 흠, 겨울도 나름 운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루미네는 흩어지는 단어 조각을 맞췄다. 종… 아니, 모로 시작했던가.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마치 옆에 목소리의 주인이 서 있는 느낌이라서, 루미네는 두 눈을 감았다.

 

유리백합으로 치장을 하고, 리월의 전통대로 혼례복을 입겠지. 물론 원한다면 몬드의 방식대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어도 자네는 어여쁠 거야. 아니면, 따로 생각해둔 의복이 있나?

 

이때가, 언제였더라. 아, 그래 맞아. 그때도 눈이 내렸었지. 당신과 나의 기억 사이에는 유독 겨울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그때도 눈이 내렸던 것 같은데... 하얗게 물들어가는 핏빛 대지가 참 이질적이었지, 중얼거리던 루미네는 그때의 "기록"을 떠올렸다.

멍하니 내려오는 눈을 보며 누군가 울기 시작하니, 다 같이 비명을 삼켰었다. 태양 빛을 받으며 금색 테두리를 두른 채 내려오는 눈송이가 그리 잔인할 수가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작은 얼음 조각이 숨통을 뚫고, 머리를 뚫고, 가슴을 뚫고 내려오던 것을 기억한다. 손 끝이 저릿하도록 시린 고통이 날카로운 비명을 안고 땅끝으로 꺼졌다. 피 대신 절망이, 비명 대신 침묵이 희멀겋게 얼어붙은 살가죽 위로 주룩주룩 흘렀다.

 

…루미네.

 

아, 생각났다. 당신은 죽었다. 맞아, 그대는 내 곁을 떠났지. 내 앞에서, 내 뺨을 쥔 채로. 바위였던 남자의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금이 가기 시작하며 먼지로 변해 흩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분명 처음이었지.

루미네는 하늘 위에 뜬 태양이 새하얗게 빛나던 걸 기억했다. 하얀 눈송이와 하얀 태양. 그 둘을 보며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다. 죽도록 새하얬다. 빌어먹게도 새하얬지. 온통 하얀 세상에서, 가장 검었던 그의 몸이 힘없이 스러졌다. 무너져 내리는 그를 보며 나는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홀로 질문하는 루미네는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때 뺨을 타고 흐르던 물방울은 눈물이었나, 녹은 눈송이었나?

한번 들추어진 "기록"은 끝을 보이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멍하니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부유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에 비탄한 심정을 삼킬 뿐. 매일 밤 죽은 이들의 환청에 시달리는 그녀를 달래주던 사람은 당신이었다. 몸에 밴 피비린내에 물 한 모금 먹지 못해 위액마저 게워내는 그녀의 옆에서 등을 두드리던 이도 그였고,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악귀처럼 싸우는 그녀에게 아름답다 해준 이도 그였다.

그와 같이 밤하늘을 보며 과거를 떠올리던 때가 그리웠다. 평화로웠던 여행을... 친우들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배가 고프면 낮에 잡았던 멧돼지 고기를 구워 요리해 먹고, 지나가던 길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있으면 선뜻 나서서 도와주었던 평범한 날들을. 손을 뻗으면 마주 잡아주는 이들이 있고, 부르면 대답해주는 친우들이 있던 때가 미치도록 그리워지면 당신과 나는 손을 잡고 별이 잘 보이는 바위 산에 올라 친구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별자리 하나에, 하나의 친구들. 그들 중 누군가가 땅의 붉은 핏물이 되어 사라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루미네는 악몽에 설쳤고, 그는 그녀의 옆에서 밤새도록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래서 당신이 내 곁에서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너무 당연한 존재라. 당신이 없으면 내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까맣게 점멸하는 시야 사이로 루미네는 부서져가는 그를 눈에 담던 때를 떠올렸다.

 

괜찮아, 루미네.

 

아…. 루미네는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바위 답지 않게 부드러웠던 당신의 살결 위로 붉게 흐르던 피가, 혹시나 신의 힘이 폭주할까 이를 악물고 스스로 자신의 힘을 갈무리하던 당신의 모습이, 식은 땀이 까만 머리카락 끝에 맺히는데도 여전히 다정하게 웃던 얼굴이, 그녀를 보던 그 황금빛 시선이, 지독하게도 선명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군.

 

쿨럭, 질리게 봐왔던 붉은 색의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그의 기록 앞에서 루미네는 숨죽여 울었다. 다정했던 금안에 비친 자기 얼굴마저 또렷이 기억한다. 뺨에 묻어난 당신의 피가 뜨겁게 흐르는데, 스러져가는 당신의 모습을 더 오래 담고 싶어서…. 자꾸만 눈물 때문에 흐려져 가는 시선에 헛웃음만 짓던 것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종려씨.

 

종려. 그래, 당신의 이름은 종려였었지. 떠올리기 고통스러워 본능이 숨겨놓았던 기록의 퍼즐 위에서 루미네는 헐떡였다.

 

왜….

 

제 앞을 가로막은 종려에게 그녀가 건넨 말은 왜, 였다. 미치도록 후회스럽다. 차라리 사랑한다고 속삭였다면, 우리의 이별은 조금 덜 비통했을 텐데. 시야 가득히 내리는 눈송이가 자꾸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목구멍을 할퀴고, 폐를 찌르고, 혈관을 얼어붙인 눈송이는 끝내 심장에 맞닿아 구멍을 내고서야 투명하게 녹았다. 부서져 내려가는 그의 몸에서는 죽음이 흘러내렸고, 작고 초라한 둘의 몸뚱아리 위에는 끝없는 화살 같은 눈송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루미네는 흩어지는 검은 바위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힌 작은 바위의 파편은 곧 먼지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미안하네, 혼인은 못 올릴 것 같아.

 

그렇게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에 루미네는 이 하얀 세상을 증오했다. 태양도, 눈도, 전쟁도, 천리도, 모두 신물이 났다. 괜찮냐고 묻고 싶었는데, 자꾸 무너져 내리려는 그의 몸을 안은 채로 내뱉은 건 언젠가, 숲속에서 들어본 적 있는 짐승의 그것과 비슷한 절규였다. 토할 듯이 밀려오는 울음을 어찌어찌 삼켜내는데,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혼례복을 입은 그대를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눈송이에선 피비린내가 났고, 태양은 시렸다. 그녀는 시야에 들어오는 푸른 하늘과 천리를 보며 저주를 되새겼다. 너는 죽을 것이다, 너는 죽을 것이다, 너는, 너는 내가 죽일 것이다. 끊임없이 짓씹으며 그녀는 뜨거운 울분을 짓씹었다. 반드시, 이 안에 있는 열기가, 너를 향한 나의 증오가 봄을 부르고 여름을 불러 너를 죽일 것이다. 빛나는 하늘을 추락시키고, 거짓뿐인 별들을 끌어내릴 것이다. 하늘을 저주하는 루미네를 보며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차마 기다리라고는 하지 못하겠어. 나를 기다리지 마, 여행자.

….

살아.

 

어째서, 당신만. 바람의 신인 바르바토스도, 영원을 추구하던 쇼군도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건만, 왜 당신만…. 루미네의 손톱이 붉은 전장의 바닥에 박히고, 그녀의 얼굴이 녹아내린 눈으로 흠뻑 젖을 때 즈음에서야 그녀는 그의 신념을 떠올렸다. 자유를 쫓던 바람의 신은 모아둔 힘을 다해 바람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면서도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여행의 끝을 같이하고 싶다고 했었다.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신이었으니, 그녀는 그가 다시 올 거라고 믿었다. 영원을 추구하던, 제비꽃 색의 쇼군은 긴 잠에 빠졌지만, 그녀 역시 곧 번개가 되어 어둠에 잠긴 티바트를 비출 거라고, 루미네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라이덴,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루미네의 억누른 울음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진다. 바람은 잔잔하게 울고 번개는 소리 없이 땅으로 내리치는 것을 보며 루미네는 텅 빈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이 바닥 아래의 바위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바람도, 번개도. 루미네가 무너질 때 마다 고요히 그들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근데… 근데 모락스, 왜 당신은….

눈앞에 선연한 그 과거의 기억에 그녀는 신음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누군가가 억지로 다디단 기억의 심연 속에 빠지는 그녀를 잡아 당겨 현실로 끌어올린 느낌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붉은 색도, 피도, 친구들도, 바위의 신도 없는 곳에서 루미네는 홀로 방황했다.

 

자네는 황금을 닮았지만, 하얀색이 참 잘 어울려.

그런가요?

깨끗하고, 눈이 부시지. 그대 또한 그러해.

 

아, 당신은 하얀색이 좋다고 했는데…. 루미네는 몸부림치며 땅을 기었다. 비참한 현실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자꾸만 끌어당겼다. 당신은 하얀색이 어울리는 내가 좋다고 했었지. 다정한 얼굴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황금보다 더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꺼져가는 빛을 보며 비명을 삭히는 몸짓이 처절했다.

추억은 또 이렇게 너무도 쉽게 현재의 고통에 불살라지고, 과거의 행복은 현재의 비참함을 장식할 뿐 절대 현실이 되지 못한다. 쏟아지는 기록들을 다시금 그러모으는 루미네의 손 끝에 또다시 핏방울이 맺혔다. 루미네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주룩주룩 떨어졌다. 쉽게 더러워지는 하얀색이 싫다. 조금만 다른 색이 묻으면 사라져버리는 하얀색이…. 당신과의 추억처럼, 겨우 이딴 현실 따위에 잿더미처럼 사라질 과거의 찬란함 따위는 싫다. 이리저리 뭉개진 단어의 파편이 얼어붙은 살가죽을 가르고 새빨간 기억을 비췄다.

약속이라도 해주지. 기다리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거짓 약속이라도 좋으니 기다려달라고… 내가 다시 네가 발걸음을 디딜 바위가 되겠다고…. 그리 말해주지. 그러면 다시 돌아온 당신과 함께 손을 잡고, 단단한 바위 위에서, 당신이 좋아했던 하얀 혼례복을 입고,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는 당신에게 삶을 함께하는 서약식을 함께 하는 꿈이라도 꿀 수 있었을 텐데.

비틀린 죄책감에 차마 사랑한단 말도 못해서 루미네는 거대한 밤을 닮은 바위의 살갗을 헤집었다. 한 때 그녀의 울음소리에도 대답하던 바위는 없었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악몽에 잠을 설쳐도, 고독한 현실에 비명을 질러도 바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홀로 굳건하게 인간의 신으로서 살아왔던 그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고, 결국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나랑 약속 했잖아요…."

 

혼인식을 올리자고, 겨울도 좋으니 함께 하자고 그랬잖아. 루미네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 것도 없다. 발 하나 디딜 땅을 잃은 루미네는 깊은 공허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당신이 없는 한, 끊임 없이 이 지옥 속에서 나는 춤을 추겠지. 바위 가루들 사이로, 함께했던 기억을 감춰둔 채, 말 없는 이 핏물 가득한 대지 위에서.

 

“모락스.”

 

왜 당신은 하필 계약의 신이라서. 왜 당신은 왜 하필 나를 사랑해서. 왜 하필 우리는 사랑에 빠져서. 왜 하필 우리는 평범하질 못해서. 어째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이 사랑했던 하얀색을 닮은 눈송이가 화살이 되어 내린다. 루미네는 뺨 위로 나붓이 내려앉는 절망 밑에서 눈을 감았다. 손바닥에 닿는 바위가 차갑다. 당신의 품은 따뜻했었는데. 루미네는 어지럽게 풀어해쳐진 기억을 다시 꾹꾹 눌러 담았다. 떠올리지 못하게.

 

영원한 것은 없어.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유리백합의 한 송이의 꽃을 꺾는 바람처럼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잔인하기도 하지. 그는 끝까지 돌아오겠다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아마 그가 돌아올 일은 없겠지.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당신이니, 후회는 하지 않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루미네는 손끝에 닿는 바위의 온도가, 시체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대단했던 당신 또한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졌다. 루미네에게 남은 건 그가 그녀에게 부탁한 기록들과 아직 이곳저곳에 남은 그의 흔적 뿐. 인간이든 신이든 결국 죽음 이후로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다.

설니홍조. 루미네는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은 눈이 녹으면 사라지고 말지. 당신의 흔적 또한 그럴 터였다. 그와의 약속은 이리도 선명하건만, 대지 위에 남은 당신의 흔적은 흐릿하다. 이 흔적들 또한 당신이 말했던 기록. 그래, 사라지고 없는 실체의 자취일 테지. 삶은 결국 사라진 것들의 자취를 더듬는 것의 연속이었다. 당신의 말대로 영원한 건 없었고, 손끝에 남은 것은 사라진 이들의 흔적 뿐이었다. 살아남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이들의 자취를 악착같이 더듬는 것. 그래, 그것이 다였다. 삶이라는 것이, 이리도 공허하다.

루미네는 천천히 옅은 숨을 내뱉었다. 부디, 당신이 말한 떠나야 할 때가 찾아오기를. 나의 마지막 숨을 거두어가, 스러진 당신의 곁으로 날 인도하기를. 기도라도 하듯 루미네는 두 손을 단정히 맞잡았다. 지금 몰려오는 것은 죽음인가, 수면인가? 잔잔히 발목을 적시며 올라오는 이 안개 같은 것이 죽음이길 바랐다. 숨을 쉬지 않는 신을 향한 기도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루미네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다정한 그라면 듣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두 눈을 감았다. 추워서 그런가, 당신이 유독 보고 싶었다. 모락스, 종려,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당신이 그립다.

그래, 지독히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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