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원의 신기루
* 루미네왼른 계절 합작글
* 주제 겨울
* 사망소재 주의
❅
"종려씨가 보기에도 제가 미친 거 같나요?"
갑자기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저런 황당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드물게도 당황하는 종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금방 침착함을 되찾은 종려는 차를 한모금 마신 후, 차분히 대답했다.
"「귀공자」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 소리가 여기까지 퍼졌어요?"
이것들은 대체 입단속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눈썹을 와락 구긴 채로 중얼거리는 타르탈리아를 향해 종려가 자신의 앞자리에 안도록 권했다. 그에 타르탈리아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휘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그러니까 이게 설명하기는 힘든데......"
잠시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던 타르탈리아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왜그렇게 봐?"
"......"
타르탈리아는 태연하게 앉아있는 인물을 아무 말 없이 허망한 눈으로 응시했다. 지금은 익숙했지만 티바트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복식에, 활동이 편하도록 넓게 퍼진 하얀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가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계속 빤히 쳐다봤더니, 상대의 기분이 언짢아졌는지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져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종려를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 눈에 루미네가 보이는데요."
그 말에 잠깐 침묵한 종려가 좀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여행자의 모습이 보인다는 뜻입니까?"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종려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미네가 죽은 지 벌써 3년은 지난 후였다.
스네즈나야로 떠났던 루미네가 사라진 후, 며칠이 지나서야 그녀는 이미 싸늘해진 몸으로 발견되었다. 인적이 드물고 나무들이 빽빽해 쉽게 이동하기도 힘든 숲에서, 차가운 눈밭에 파묻혀 있었던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잠이 든 듯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쉽사리 믿지 못했다. 루미네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힘과 마음을 갖고 있었고, 많은 이들의 호의를 받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말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리월의 왕생당에서 그녀의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전 세계에서 그녀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타르탈리아는 루미네를 추모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 했다. 리월과도 얼굴 붉힐 일이 있기도 했고, 공개적으로는 루미네와 대립하는 입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차마 갈 수 없었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타르탈리아는 기껏 리월 앞까지 향했지만, 결국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은 온종일 차가운 비가 내렸기에 참담한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날씨였다.
타르탈리아의 주변 공기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타르탈리아의 시야에는 아직도 루미네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 시야의 구석에 들어왔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듣는 루미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확인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늘 자신감이 넘치던 그였지만,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유독 자신이 없어졌다. 종려는 다른 사람이 듣지 않도록 목소리를 좀 더 낮추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는 않군요. 왕생당의 현 당주만 해도 귀신을..."
"그것 뿐이었으면 당신을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타르탈리아는 이유 모를 초조함에 종려의 말까지 끊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도 옆에 있어요."
"여행자 말입니까?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게 문제예요. 아무래도 저한테만 보이는 것 같아요."
"그것참......"
종려는 굳이 뒷말을 내뱉진 않았지만, 타르탈리아는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요컨대 정말로 정신이 나가버린 타르탈리아가 그녀의 허상을 보는 것이 아닐지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타르탈리아 본인도 그런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으니까.
일의 시작은 나흘 전으로, 스네즈나야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차에, 새하얀 눈밭 위에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저 닮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히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겨울의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는, 그 얇고 새하얀 옷을 입은 금발의 소녀가 설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던 찰나, 그녀가 타르탈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타르탈리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짧은 거리를 지나는 시간이 어찌나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자신도 모르게 숨조차 내뱉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타르탈리아의 코앞에서 멈추자, 곧이어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르탈리아, 내가 보여?
그 당혹스러운 질문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발밑을 보았다. 그제야 이질감을 느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발 뒤로 보이는 눈밭 위에 발자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티바트에서 종종 귀신이 보인다는 목격담이야 흔히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루미네가 보이는 사람이 타르탈리아 뿐이었던 것이다.
루미네의 모습을 한 존재의 말에 따르면, 처음 눈을 뜬 곳은 티바트에서 자신이 제일 먼저 밟은 장소였던 별이 떨어지는 호수였다고 한다.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어떠한 기억도 나지 않는 상태였다. 어느 정도 혼란스러움이 진정된 후에 몬드성으로 찾아가자 그곳에서 겪은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곳을 가든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씁쓸한 기분을 안고서 다음으로 루미네는 리월을 향했다. 리월항에 도착하자 리월에서의 기억을 되찾았고, 그곳에는 소나 중운처럼 귀신을 볼 수 있는 이들이나 이런 일에 전문인 호두도 있을 테니 자신을 알아볼 거라는 희망을 느끼며 그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리월항에 있는 그 누구도, 심지어 일곱신들조차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가 없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스네즈나야까지 도달하자 그녀는 많은 기억을 되찾았지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쳐있을 무렵, 타르탈리아를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루미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보이는 이가 타르탈리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타르탈리아도 나름대로 원인을 찾아내고자 스네즈나야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슷한 선례를 수색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타르탈리아가 '혹시 내가 미친건가?'라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타르탈리아가 루미네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는 수시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기에, 우인단 내부에서도 그가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리월에 있는 종려를 찾아가기까지 한 것이었다.
타르탈리아의 설명을 들은 종려는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타르탈리아가 허공을 보며 "종려 씨랑 단둘이 대화할 거니까 넌 좀 다른 곳에 가 있어."라는 말과 함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자 더욱 심란한 표정으로 변했다. 곧 아무도 없는 쪽으로 손을 흔드는 타르탈리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동안 여행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까?"
"내가 미쳤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유가 원인은 아닐 걸요?"
루미네의 죽음으로부터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타르탈리아는 루미네가 죽은 후에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챙겨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그녀의 죽음에 슬퍼할 여유도 없었고, 그럴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타르탈리아의 모습은 정말 멀쩡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그녀가 그리워 허상을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일단 호당주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일에는 전문인 아이니까요. 다만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 이후로 타르탈리아는 종려를 통해 호두를 소개 받았지만, 그 왕생당의 당주 마저도 타르탈리아의 옆에 있는 루미네를 볼 수가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경우에 왕생당에서도 쉽게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만약 다른 방도나 가능성을 찾으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타르탈리아는 리월을 떠나기로 했고, 루미네는 그의 옆에서 이 상황을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리월에서 스네즈나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서 한참 시간이 지나자, 어느덧 스네즈나야에 도착하여 하선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타르탈리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배에서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루미네는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먼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루미네는 사물이나 생명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인지, 물건을 만지거나 올라갈 수는 있어도 사물을 옮기지는 못 했다. 심지어 움직이는 물체나 생명체와 닿으면 몸이 통과하는 것 같았다. 타르탈리아도 루미네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것은 가능해도 만질 수는 없었다. 루미네의 몸이 반투명하게 통과되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이상하여 굳이 접촉하려는 시도는 그만두기로 했다.
리월과 스네즈나야의 기온 차는 극명하기 때문에 외투를 두껍게 입고 배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눈이 내리기 시작한 후였다. 루미네는 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추위나 더위도 느끼지 않는지 옷이 얇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어도 입김 하나 나오지 않았다. 타르탈리아가 루미네의 옆에 다가서자 루미네가 아까보다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종려 씨를 찾아간 거야?"
"그야 종려 씨는 왕생당 객경이니 이런 것도 잘 알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런 얘기를 여왕님이나 다른 집행관들한테 할 수는 없으니까."
"하긴 너 친구 없었지."
"내가 왜 친구가 없어? 네가 있잖아."
타르탈리아의 능청스러움을, 루미네는 가볍게 무시하고는 허공을 응시했다.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을 기어코 따라와서는, 본인이 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자 기분이 울적한 듯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보아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타르탈리아가 함부로 이해를 논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페이몬은 아직 못 만났는데, 혹시 어딨는지 알아?"
"글쎄, 일단 난 모르겠는데... 애초에 그 꼬맹이는 날 만나기 싫어하지 않을까?"
"왜?"
"그야 우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 싸웠잖아."
그의 말에 루미네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눈만 깜빡이며 타르탈리아를 쳐다봤다. 아, 아직 기억이 다 안 돌아왔나? 타르탈리아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오기 무섭게 루미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치도 빠르고 제법 예리한 루미네가 이런 점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루미네가 타르탈리아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왜 싸웠는데?"
"별로 들어서 좋을 얘기도 아니잖아."
"그럼 어디서 싸웠어? 내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아직 안 가본 장소였을 거 같은데."
"하하, 벌써 3년은 넘게 지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
평소와 같은 웃음과 적당한 변명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루미네는 여전히 수상하다는 얼굴이었다. 타르탈리아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목구멍에 가시라도 박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마 아무리 그녀가 추궁하더라도, 본인의 입으로 먼저 실토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루미네는 곧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미 죽은 마당에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네가 지금 날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직도 화가 날 정도로 다툰 건 아닐 테고. 나중에 기억이 돌아왔을 때 다시 얘기해도 상관없겠지."
"그래도 기억이 떠오르면 너는 다시 화가 날 수도 있잖아?"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거 같지는 않은데."
"무슨 근거로?"
"내 감."
루미네는 단순하게 대답하고는 이 주제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타르탈리아는 여전히 복잡한 심경이었다. 루미네라면 기억이 돌아와도 싸운 이유 따위는 정말 신경 안 쓸 수도 있다. 원래부터 그런 걸 담아두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속 깊이 묘하게 납득할 수 없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타르탈리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미네의 발걸음은 가볍게 보이기만 했다.
그 이후로 둘은 함께 걷고 있었지만 가끔 대화를 나누기만 했다. 결국 늦은 밤이 되어서야 타르탈리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타르탈리아가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씻고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창가에서 서 있는 루미네가 눈에 들어왔다.
"뭐 하고 있어?"
그녀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루미네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타르탈리아의 기척을 느낀 루미네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왜 안 버렸어?"
정확히 언제였는지 이젠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에, 루미네가 품 안에 작고 옅은 노란색 화분을 들고서 스네즈나야로 돌아가려는 타르탈리아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이게 뭐야?
세실리아 꽃. 선물이야.
스네즈나야에서 이런 꽃을 키우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럼 시들었을 때 버려.
날짜는 기억이 안 나는데도 대화만큼은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루미네는 타르탈리아에게 그 건조한 말과 꽃만 안겨주고서는 바로 떠나버렸다. 타르탈리아는 그 화분을 집으로 들고 왔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극심한 추위를 평범한 꽃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질긴 꽃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긴 했으나 결국 타르탈리아가 한창 일로 바빠 돌봐주지 못 하자 시들어 버렸고, 생명을 잃은 꽃은 금세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
"왜 안 버렸냐니, 날 선물 받은 걸 그냥 버릴 정도로 매정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너무하네~"
"내가 버리라고 했잖아."
"안 버릴 거야."
"나는......"
무언가 더 말하려던 루미네가 입을 꾹 닫아버렸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다시 루미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죽은 꽃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어."
예상외로 루미네가 집요하게 나오자 타르탈리아는 의아함과 함께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방에 있는 듯 없는 듯 창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어째서인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고작 화분 하나에 실랑이를 벌이는 루미네도, 별거 아닌 것에 고집을 부리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버리지 않는다고 네가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너는 지금 아무 것도 못 하니까.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려던 타르탈리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루미네를 돌아보았다. 자유롭지 못한 상황은 아무리 루미네라고 하여도 힘겨운 일일 텐데, 그 사실을 이용해 자칫 그녀를 무시하는 말이 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루미네는 가만히 서서 타르탈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화를 낼까 싶었는데,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가 화가 난 듯하면서도,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타르탈리아는 속으로 욕을 내뱉고는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의 실언을 인정했다. 최근 들어 유독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미안, 방금은 내가 실수했어. 이 건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알겠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미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 주었다. 타르탈리아는 급격하게 몰려드는 피로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뱉었다. 영혼은 잠도 오지 않는 것인지, 그동안 루미네는 타르탈리아가 잠든 동안 무얼 하는 지는 몰라도 늘 깨어 있었다. 하루는 밖에 나가기도 하고, 하루는 집 안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늘 타르탈리아의 주변에 있었지만, 타르탈리아는 매번 잠들기 전에 생각했다. 과연 이번에도 눈을 뜬 순간에 그녀가 옆에 있을까? 갑작스럽게 나타났던 것처럼, 다시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잘 준비를 마치고 타르탈리아가 침대에 몸을 눕히는 순간까지도, 루미네는 타르탈리아의 방 안에서 나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까의 일로 제법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그저 창문 앞의 작은 화분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이 들기 직전, 타르탈리아는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일 봐, 친구."
그 바람과도 같은 말에, 루미네가 조용히 무어라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점차 의식이 흐려졌다.
◦◦◦
겨울의 햇빛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다른 계절보다 밝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렇기에 매일이 겨울 뿐인 스네즈나야는 이른 아침이 되면 방 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햇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타르탈리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루미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미네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원래 자신의 방에 있을 인물이 아니니 이런 풍경이 맞는 일상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간밤에 타르탈리아는 지겨운 꿈을 꾸었다. 지금까지 수백번은 꾼 듯한 그 꿈은, 악몽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했으나 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근년에는 잘 꾸지 않게 되었었는데, 얼마 전 루미네를 만난 날부터 다시 같은 꿈을 꾸는 중이었다. 그날의 일은 아무리 떠올려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타르탈리아는 꿈을 상기시키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자리가 사나웠던 탓인지 피로가 온전히 풀리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대로 침대에 파묻힐까 생각도 했지만, 하루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좀이 쑤시기에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 문에 손을 댔으나 잘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새 눈이 쌓여 입구를 막아버린 듯했다. 결국 문이 부서질세라 몇 번 밀어붙인 끝에야 겨우 틈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문틈으로 힘겹게 빠져나오니 조금 떨어진 곳에 쭈그려 앉은 루미네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신에게 보이는 루미네란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서 뭐 해?"
아침 인사는 생략한 채, 타르탈리아의 목소리에 두 개의 금빛 눈이 그를 돌아보았다. 루미네는 옷에 흙이 묻었을 리가 없지만 습관적으로 옷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타르탈리아의 앞으로 걸어왔다.
"깨어나기 전에 돌아가려 했는데 한 눈 팔려서 어쩌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나보네."
"뭐에 한 눈이 팔렸는데?"
타르탈리아의 물음에 루미네가 말없이 손끝으로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새하얀 여우 한 마리가 보였다. 본래 사람을 향한 경계심이 심한 동물이지만 현재 루미네는 기척이 없다 보니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꽤 귀엽더라."
"너 여우 사냥 자주 하지 않았나?"
"그야 고기가 필요하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할 소린 정말 아니지만 보통은 귀엽다고 느끼면 동정심이 들어서 죽이는 걸 꺼리게 되지 않나...? 원래부터 사적인 감정에 구분을 확실히 짓는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타르탈리아가 이런저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루미네가 다시 그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부탁이 있는데, 오늘 한가해?"
"일단 오늘은 일이 없긴 하지."
"그럼 할 일이 많으니까 서두르자."
어리둥절해 하는 타르탈리아를 버려둔 채, 루미네는 혼자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타르탈리아는 가만히 서서는 루미네의 뒷모습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뭘 하려고?"
"낚시."
"뭐?"
"낚시도구 들고 따라와."
루미네는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먼저 떠나버렸다. 루미네가 떠난 방향으로 보아, 아마도 주변에 있는 연못으로 향한 것 같았다. 루미네를 데리고 간 적이 없었는데도 알고 있는 걸 보면 혼자 다닐 때 연못을 발견한 건가 싶었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낚시를 하자고 하는 걸까? 그동안 루미네는 타르탈리아를 따라다니기만 했었다. 루미네는 그 이유를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차라리 대화만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식의 말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먼저 무언가를 하고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타르탈리아는 문 앞의 눈을 대충 치워 도로 집으로 들어간 후, 서둘러 낚시도구를 챙겨 나왔다. 집 주변에 위치한 연못가로 향하니 아니나 다를까, 루미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굳이 시작하자는 신호가 없어도 알아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타르탈리아."
타르탈리아가 얼어붙은 연못을 깨기 위해 장비를 꺼낼 무렵, 루미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루미네를 바라보자 그녀는 연못의 얼음 위로 올라가 걷고 있었다.
"네가 여기 위로 올라와서 한 번 뛰어보는 건 어때?"
타르탈리아는 잠시 멍하니 눈만 깜빡이더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얼마나 단단한지 나로 실험하려는 거야? 그러다 내가 빠지면?"
"내가 꺼내줄게."
어떻게 저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타르탈리아가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루미네를 바라보자, 루미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얼음 위를 사뿐히 뛰어서 타르탈리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농담이였어. 그냥 낚시나 하자."
"그런데 왜 갑자기 낚시를 하자고 하는 거야?"
"같이 하러 가기로 했었잖아."
그 대답에 타르탈리아는 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분명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루미네는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타르탈리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루미네가 가벼운 투로 덧붙였다.
"그냥 기분만 내는 거지. 안 하면 아쉽잖아."
"그래, 그러자. 약속은 지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혀가 꽁꽁 얼어붙을 테니까?"
"잘 아네. 스네즈나야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릴."
이번에는 타르탈리아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고 있으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타르탈리아와 루미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롭게 얼음낚시를 시작할 수 있었다. 기다리면서 종종 대화를 나누니 지루하지도 않았다. 꽤나 무난한 낚시로 보였다. 타르탈리아가 3시간 동안 고작 빙어 2마리 밖에 낚지 못 했다는 사실을 빼면. 휑하니 비어있는 양동이를 내려다보던 루미네는 시선을 돌려 타르탈리아를 향해 짜게 식은 눈빛을 보냈다. 한동안 둘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만이 오가고 있었다.
"...낚시 잘한다며. 이게 뭐야?"
"이건...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래."
"예, 그러시겠죠."
루미네의 목소리는 완전히 신용을 잃은 듯한 투였다. 타르탈리아는 상당히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결과가 이렇다 보니 달리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타르탈리아는 허탈한 자신의 마음만큼 가벼운 양동이만 털레털레 들고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낚시가 끝난 후에도 루미네의 알 수 없는 '약속 지키기'는 계속되었다. 그날의 식사로는 루미네의 의견을 반영해 타르탈리아가 직접 만든 보르쉬를 먹었지만, 물론 루미네는 한 입도 대지 못 했다. 그는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루미네의 뜻은 견고하다 못해 고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루미네는 하루에 한 두 개씩 약속을 지키라며 부탁을 했고, 심지어는 얼음 조각품을 보러 가자는 루미네의 말에 막무가내로 스네즈나야의 장인을 찾아간 날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우인단 집행관이 등장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은 물론, 썩 편한 자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품을 감상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루미네도 마음에 들었는지 "너도 한 번 도전해볼래?"라며 넌지시 농담을 섞어 묻는 말에 웃으면서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타르탈리아의 본가에 돌아가 동생들을 놀아주게 되었다. 같이 눈싸움을 하고, 저녁을 먹고... 당연하게도 그의 가족들도 루미네를 보지는 못 했지만,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루미네는 더 이상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평소보다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 그녀의 가족이 떠올라 그런 것이라 추측되어 잠깐 걱정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루미네는 오랜만에 테우세르도 만나고 다른 동생들도 만난 것에 반가움을 느끼는 듯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고, 문제가 벌어진 날은 하루종일 눈이 내리고 있는 날이었다. 폭설까지는 아니었지만 눈이 쌓이는 속도가 빨랐기에 타르탈리아는 '오늘은 나갈 일이 없겠지.'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루미네는 저녁 즈음이 되자 어김없이 타르탈리아를 찾아와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타르탈리아는 곁눈질로 창밖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루미네를 돌아보았다.
"눈이 아까보다 덜 내리기는 하는데 지금 나가려고? 눈이 꽤 쌓여서 가기 힘들 거야."
"그럼 이번에는 안 따라와도 괜찮아."
루미네는 스네즈나야의 야경을 보러 갈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는 루미네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을 테니 굳이 따라갈 필요도 없을 뿐더러, 눈을 맞아도 젖을 일이 없는 루미네는 더욱 가기 편할 것이다. 그렇지만 따라가지 않자니 영 찜찜한 기분이 드는 탓에, 결국은 옷을 걸쳐 입고 루미네와 함께 집 밖으로 나서기로 했다.
발이 눈 속으로 푹푹 꺼지고 경사진 길은 미끄러웠기에 오르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생을 스네즈나야에서 살아온 덕분에 요령껏 안정적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래도 루미네보다는 속도가 느린 것이 당연할 텐데, 루미네는 먼저 앞서가지 않고 타르탈리아의 속도에 맞춰 걸어주었다. 늘 앞서가던 그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 변화에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명확한 원인은 알아낼 수 없었다.
높은 지형에 다다르자, 어느덧 밤이 되어 하늘에는 짙은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눈에 덮인 마을 곳곳에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제법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별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마치 그 등불이 지상의 별이 된 것 마냥 차갑고 어두운 스네즈나야의 땅을 밝히고 있었다.
루미네는 그 경치만을 가만히 내려다 보며 한참을 구경만 하더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돌려 그런 루미네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무심코 중얼거렸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약속을 지키려는 거야?"
타르탈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미네가 눈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루미네는 천천히 입을 열어 단조로운 투로 대답했다.
"생각해 봤는데 굳이 너한테만 내가 보이는 거에 어떤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거든."
"그래서 그 원인이 나랑 한 약속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일단은 그랬지. 처음에 너와 관련된 것 중에서 떠오른 가능성은 그거 하나 뿐이었으니까."
루미네는 다시 시선을 야경 쪽으로 고정했다. 타르탈리아는 목이 바짝 마르는 듯한 느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럼 약속을 모두 지키면?"
약속을 모두 다 지키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타르탈리아의 메마른 목소리에 루미네가 설핏 웃는 소리를 내뱉었다.
"글쎄, 자유로워지려나? 너한테마저 안 보이게 될지도 몰라... 아니면 아예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는 걸 바라기에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는 걸까. 또 다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답답한 감정이 타르탈리아의 온몸의 휩쓸고 지나갔다. 타르탈리아가 무어라 입을 더 열기도 전에, 루미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미리 미련을 없애놓으면 좋잖아? 나중에는 그냥 실컷 노는 걸로 목표가 변질되어 버린 것 같긴 하지만."
"만약에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게 되면 여행을 떠나야지."
"여행?"
"응, 지금처럼 여행하기 쉬운 상태가 또 어딨어? 잘 필요도, 먹을 필요도 없고, 체력이 닳지도 않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살아선 못 갔던 장소도 가서 오빠를 찾아봐야지. 나랑 오빠는 서로를 느낄 수 있으니까 지금의 나도 알아봐 줄지도 몰라."
그 홀가분한 가정에, 타르탈리아는 '그것참 신기하네. 평범한 인간 맞아?'라고 답하려 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그런식으로 능청스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냥 계속 여기 있으면 안돼?"
실수로 새어나가 버린 말이, 밤이 너무 고요한 탓에 더욱 선명하게 퍼져버렸다. 루미네는 순간적으로 놀란 듯 타르탈리아를 돌아보았다. 타르탈리아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기에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그는 변명하듯 말을 덧붙여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아니면 나랑 같이 지내는 게 그렇게 지루했던 거야? 그런 거라면 나 좀 상처 받을 거 같은데."
평소처럼, 평소처럼만 대답하자. 타르탈리아는 속으로 되뇌며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친구는 매정하네... 늘 달고 살았던 말을 중얼거려서,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랐다. 그러나 루미네는 이미 웃음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루미네가 시선을 내리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르탈리아, 나는 딱히 네 옆이 싫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알고 있어. 평소처럼 별 뜻 없는 말이었던 거지?"
"그게 아니야. 나는, 네가 약속을 못 지켰었던 걸 아쉬워했으니까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지키면 너도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루미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타르탈리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루미네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는 늘 내가 앞서간다고 했지만, 나는 너를 혼자 놓고 가버리려던 게 아니라..."
"그 말."
"어?"
"그 말을 네가 어떻게 아는 거야?"
그제야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낀 루미네는 뻣뻣한 고개를 들어 타르탈리아를 올려다보았다. 타르탈리아는 방금 전보다 한 뼘 더 다가와서는,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표정으로 루미네를 응시했다.
"네가 죽은 후로는 약속에 대한 것도, 그 말도 내가 먼저 꺼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떠올린 거야?"
루미네는 자신이 당황하여 실수를 했단 것을 깨닫고 눈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짐작이 정답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이미 기억이 전부 돌아왔구나? 그럼 다 알고 있겠네."
"......"
타르탈리아는 처참한 미소를 지었다. 깊은 심연에 들어갔던 순간 보다도, 나락이 코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다음 말이 나오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널 죽인 사람이 나였다는 것도."
루미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했다. 그녀의 얼굴은 도저히 진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볼 수 없었으며, 타르탈리아는 그런 루미네의 모습을 보자 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루미네의 팔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의 손은 허무하게 통과될 뿐이었다. 허공에서 스쳐 지나간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던 타르탈리아는, 주먹을 쥐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밤마다 어딜 그렇게 가나 했더니, 자신이 죽었던 장소를 찾아다녔던 거였구나."
루미네는 웬만한 장소를 전부 가보았는데도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떠오르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의문점은 하나가 아니었다.
루미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생전에 워낙 유명했었기에 남아있는 자료로 겨우 자신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정확한 전말은 알 수 없었지만, 날카로운 것에 찔려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즉사가 아니었기에, 루미네는 그것에 첫 번째로 이상함을 느꼈다. 신상으로 회복하든, 워프를 타서 도망치든, 급한 응급처치로 시간을 벌든... 방법은 충분히 많았을 텐데도 자신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죽었다는 것이 의아했다.
두 번째는 자신과 페이몬은 늘 함께였는데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페이몬은 날 수 있기에 자신을 죽인 범인과 조우해도, 쉽게 도망칠 수 있으니 범인의 정체를 알리고 자신의 시신도 금방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시신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우연히 발견되었고, 사건은 누가 일부러 덮은 것처럼 흔적과 증언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미네는 어차피 할 것도 없는 밤부터 새벽을 이용해 자신이 죽은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마침내 루미네는 인적이 드문 어느 숲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모든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알았던 거였는데?"
"...너네 본가로 가기 전 새벽에."
그제야 타르탈리아는 그날 루미네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루미네는 자신에게 티를 낸 적도 없었으며, 그 후로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타르탈리아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 것만 같았다. 루미네가 차라리 자신을 원망하고 화를 냈으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하하, 그동안 나 완전 바보같이 굴고 있었네... 그래,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네가 나를 죽인 건 맞지만, 그건 내가 받아들인 결과였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는 나를 그 정도의 염치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야?"
루미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 타르탈리아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은 루미네한테 이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간 루미네와 지내면서,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자신의 죄도 잊고서는 감히 옆에 있고 싶다고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다시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친 오만이었다.
타르탈리아가 몸을 돌려 길을 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 뒤로 루미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따위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도중에 멈추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이제는 아까보다 얌전해진 눈이, 칠흑 같은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와 눈가로 떨어져 녹아내렸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보자니, 한톨도 잊을 수 없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
눈이 꽤 오래 내리고 있었기에, 이 숲으로 들어온 발자국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아마 도로 빠져나가더라도 이 속도면 흔적이 남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외진 곳이었기에, 목격자가 쉽게 나올 리도 없었다.
타르탈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내리며 하얀 입김을 뱉었다. 눈썹을 와락 구긴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검을 털어 새하얀 눈밭에 검붉은 피를 흩뿌렸다. 타르탈리아는 작게 호흡을 들이쉰 후,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왜 가만히 있어?"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앞에 주저앉아있는 이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루미네는, 타르탈리아의 공격을 받아 피가 쏟아지는 배를 한손으로 움켜잡고는, 가만히 있었다. 숨이 가쁜 듯 호흡이 거칠고, 무엇이든 얼어버릴 것 같은 이 추위 속에서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그 두 눈만큼은 생명의 빛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 옆에서 페이몬이 울며 소리를 지르든 말든, 타르탈리아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도망을 치든, 반격을 가하든, 치료를 하든, 꼬맹이를 시켜 사람을 부르든, 뭐든 방법은 있었잖아. 네가 고작 이 정도 공격에 당한다고?"
"그러는 너도, 날 죽여야 하는 거면 왜 더 공격하지 않는 건데?"
"정말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타르탈리아의 표정이 처참히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루미네는 그 모습을 흘끗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아... 네가 이러는 이유야 보나 마나 뻔하지... 대충 가족들의 목숨이라도 걸렸나보지? 너의 그 단순하고 무식한 해결방식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가네."
타르탈리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올 정도였다. 루미네의 추측은 정확했다. 처음 그에게 루미네를 처리하는 명령이 내려졌을 땐, 그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인단에서 취한 대응은 간단했다. 그의 가족들을 인질 삼아 협박한 것이었다. 타르탈리아가 가족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단 것을 아주 잘 알기에.
우인단 집행관들 중에서 타르탈리아가 가장 강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집행관들도 충분히 루미네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혼자서 역부족이라면 비겁하기는 해도 여럿이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이유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기어오르지 마라는 경고. 어느 집행관이 "정이 든 것은 많아질 수록 약점이 되지."라며 자신을 향해 비웃던 것이 떠올랐다.
타르탈리아는 루미네를 찾아왔다. 가족을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미네 또한 그녀의 적인 데다, 감정이 깊지 않은 자신보다 혈육을 택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나 결코 이런 상황이 되더라도 상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목숨을 걸고서 그녀와 겨뤄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타인의 의도로 이루어진 허무한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내가 원한 건 네 옆에 동등한 위치로 서는 거였지, 이런 비겁한 방식으로 앞지르는 게 아니었어."
타르탈리아의 갈라진 목소리에도, 루미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넌 항상 앞만 보고 가잖아. 남들은 쉽게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로, 주변은 돌아보지도 않고 혼자 앞서나가지."
네 주변 사람들은 늘 떠나가는 너의 뒷모습만 바라볼 것이다. 타르탈리아가 강해질 수록, 루미네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빠르게 강해졌다. 그 거리를 좁히려 했는데, 늘 닿을 듯하다가도 멀어졌다. 결국 그 차이는 앞으로도 점점 벌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될 것이다. 과연 자신이 뜻을 이루는 순간에 루미네가 옆에 있어 주기나 할까?
"네가 도중에 한 번이라도 돌아봤으면, 나를 발견했을 텐데."
"......"
"뭐,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간 했었던 약속도 못 지키게 됐네. 정말 아쉽다니까......"
이것이 맞다. 자신에게 루미네는 적이었고, 여왕님의 명령을 우선시 해야 하며, 가족들을 지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지금의 상황도, 자신들의 관계도.
루미네가 한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매사에 철저한 그녀가 어째서 방심해 버렸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어버린 상태에서, 별다른 수를 쓰지 않는 한 아무리 그녀라 해도 타르탈리아를 손쉽게 이길 수는 없을 테였다. 그러니 지금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둘 중에서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정적이, 얼마나 지난 지도 모른 채.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하던 루미네의 눈에 돌연 생기가 돌면서,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어냈다. 타르탈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루미네가 곧 자신을 향해 욕을 하든, 검을 고쳐들고 반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페이몬."
"으,응...?"
둘의 대화에 미쳐 끼어들 수 없어 가만히 울고만 있던 페이몬이 화들짝 놀라며 루미네에게로 날아왔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죽으면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 사유도, 장소도."
"그게 무슨......"
"어차피 내가 죽는 순간 오빠가 알아차릴 거야. 그럼 티바트를 쥐 잡듯 뒤지겠지... 일주일 정도만 시간을 벌면 돼."
"싫어,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 짐은 페이몬이 전부 가져도 돼. 네가 두고 가야 할 건 나 하나 뿐이야."
이어진 루미네의 말에 타르탈리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런 타르탈리아와는 다르게, 사색이 되어 매달리는 하나뿐인 파트너를 향해 그리 잔인한 말을 전하면서도 루미네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루미네는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페이몬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타르탈리아, 너한테도 부탁할게. 페이몬은 해치지 마."
"...포기하려고?"
"그럴 리가. 언젠가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을 해보자고 했었지?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네."
타르탈리아를 돌아보며 말을 마친 루미네가, 천천히 일어서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타르탈리아는 한숨을 내뱉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도망치지도 않고, 도망칠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망갔더라면, 모르는 척 돌아섰을 텐데.
루미네가 다시 검을 꺼내며 가볍게 손에 쥐었다. 발밑에는 그녀의 피로 얼룩져 붉게 물든 눈의 흔적들이 보였다. 그 위에서, 루미네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어울려줄게."
◦◦◦
페이몬이 자리를 뜬 후로도 타르탈리아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페이몬이 자신을 향해 무어라 저주의 말을 쏟아냈지만, 그는 그저 "울다 쓰러지겠다. 돌아가서 물이라도 마셔."라고만 답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가 페이몬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페이몬은 그 말을 듣고는 더 서럽게 울며 혼자 떠나갔다. 결국 페이몬은 루미네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던 발을 겨우 떼어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앞에 천천히 주저앉아 눈앞의 루미네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손을 뻗어 루미네의 손목을 잡고 들어 올리니, 힘이 빠져버린 팔이 너무나도 손쉽게 끌려 올라왔다. 흘러내리는 손을 놓쳐버리면 바스러질 것만 같아, 다시 굳게 고쳐쥐고는 자신의 뺨에 그녀의 손등을 가져다 대 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모든 온기가 빠져나갔는지, 내리는 눈 보다도, 불어오는 바람 보다도 차가웠다.
자신의 손에 떨어진 눈은 녹아내리는데, 그녀의 이마 위로 떨어진 눈들이 녹지 못하고 쌓여갔다.
살면서 숱하게 경험한 죽음이었다. 수없이 다른 생명을 뺏어오며 살아왔다. 너무나도 익숙해진 감각이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처음 겪어본 일인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더는 이 세상에 루미네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그녀를 스스로 죽이고서도, 이렇게나 무덤덤한 기분일 수 있는 건 그래서일까?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혹여나 남은 온기가 있을까 쫓듯이 끌어안으니,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하기만 한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아주 다른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앞으로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니.
타르탈리아는 조소를 터트렸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루미네와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그녀를 제 손으로 죽인 후에야 품에 안고 있는 꼴이라니.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자 앞머리가 자신의 이마를 간질이는 것이 느껴졌다. 타르탈리아는 눈을 감고서 다정한 어조의 말들을 퍼트렸다.
"루미네."
듣고 있어?
만약에 다른 결말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너와 같이 여행을 해보고 싶어. 이 대륙의 끝이든, 깊은 심연 아래든, 다른 세상이든 간에. 그러니, 기다릴게.
대답이 올 리 없는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
문뜩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자신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는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밤새 내리던 눈은 언제부터인가 그쳐서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겨울 뿐인 스네즈나야에선 보기 드문 날씨였다. 간밤에는 그리도 눈이 내렸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길에서 내려온 후에도 마을로 향하지 않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 채 발밑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참 후에 좁아진 시야에 익숙한 신발이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것이 두려워져,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동시에 이런 잠깐의 회피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머리 위로 루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르탈리아."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어 고개를 드니, 코 앞에 서 있는 루미네는 평소와 같이 차분한 표정이었다. 언덕에서 헤어지기 전에만 해도 동요하는가 싶더니, 그새 마음을 정리한 것인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타르탈리아는 그저, 왜인지 모르게 그 사실이 분하고 답답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니 순 제멋대로네. 왜 자꾸 심술부려? 나보고는 먼저 가지 말라고 투덜거리더니, 기껏 맞춰주니 이번엔 자기가 먼저 가버리고."
루미네는 어이없다는 듯 말하더니, 이어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도 화를 안 내는데 왜 네가 화가 나 있냐, 원래 이렇게 답답한 성격이었냐, 하고 싶은 말이 있음 똑바로 해라... 그렇게 말하는 말투가, 마치 별거 아닌 일로 싸운 후에 질책하는 것만 같아서, 그는 되려 미칠 지경이었다.
"...할 말이, 그거 뿐이야?"
"그럼 무슨 말이 더 필요한데?"
루미네가 의아하다는 듯, 금빛 머리칼을 흘러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타르탈리아는 착잡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나를 원망한다든가, 복수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거야?"
내가 너를 죽였잖아. 모든 걸 망친 원인이었잖아. 뒷말은 나오진 않았지만, 분명 루미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타르탈리아는 가만히 루미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루미네의 얼굴에 언짢은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뭐?"
"아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꼭 원망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루미네가 몸을 돌리더니 주변의 눈을 파내려는 듯 가볍게 땅을 찼지만, 눈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아 허공에 발길질만 하는 꼴이었다. 그것 보라는 듯 다시 타르탈리아를 돌아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무기는 커녕 깃털 하나도 못 잡는 상태로 너한테 무슨 수로 복수를 해? 누구 놀리나?"
"다른 방법의 복수도... 있을 텐데."
"이미 죽은 마당에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널 용서할 건 아니지만, 그거랑 별개로 어떻게 여기든 그건 내 권리지 네 마음 편해지라고 하는 일이 아니야."
사실 루미네도 처음에 기억이 돌아왔을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혼란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고 애달프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이성을 잃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그 덕분에 남들과는 달리 냉정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생각을 정리하자, 루미네는 누구보다도 타르탈리아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도 타르탈리아를 죽여야만 혈육을 구할 수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검을 겨눴을 테니까. 마냥 그의 선택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는, 자신의 희생의 결과가 궁금해졌다. 새롭게 생긴 궁금증을 풀고자 그의 집을 찾아갔다. 타르탈리아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가족들은 무사히 살아서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쓸쓸함은 깊어졌지만, 더 이상 따질 기분도, 일말의 생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언제 이렇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고, 그걸 알면서도 굳이 멀리하지 않은 것은 서로가 선택한 일이었으니, 자업자득일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니, 굳이 이전의 관계와 달라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우린 늘 그래왔으니.
"어차피 너도 지나간 일을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잖아."
하지만 타르탈리아는 이 사실을 단순히 지나간 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에도 저렇게나 초연한 루미네가 비정상인 것이 아닐까? 그 사실이 타르탈리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욕을 하고, 저주를 하지... 단 한 번도 곁을 주지 않았으면서, 늘 자신을 받아주는 그녀의 심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라도 드는 거야?"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그 침묵이 긍정의 뜻이란 것 쯤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루미네는 고개를 숙여 타르탈리아의 이마를 향해 딱밤을 날리듯 손가락을 튕겼다. 물론 타르탈리아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집중을 끌어모으기에는 효과적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타르탈리아를 두고 루미네는 몸을 일으켰다.
"정 그러면 나 좀 도와주기나 해."
"도움?"
"내 미련도 지워보려고."
타르탈리아와 했던 약속들은 그의 미련이었고,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실행되었기에 굳이 남은 것까지 시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의도를 전부 들킨 마당에 해봤자 의미도 없다. 그렇지만 루미네는 다른 미련이 남았을 수도 있다. 고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그녀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 그녀의 미련이 무엇일지 궁금해 가만히 뒷말을 기다리니, 시선을 알아차린 루미네가 스트레칭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별 선물을 할 거야."
"누구한테?"
"나하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 모두에게."
"...몇 명인데?"
"그러게? 흠... 대충 한 나라당 20명씩 하면 150명 쯤 되려나?"
루미네는 그 많은 선물을 사들일 모라도, 나눠줄 여건도 없었다. 그러니 타르탈리아의 손을 빌리려는 것일 텐데, 그 뜻은 선물을 고르는 것 외에 모든 준비는 타르탈리아가 대신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숫자에 타르탈리아가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루미네가 피식 미소 지었다.
"어차피 너한테 이 정도 선물을 살 모라 쯤이야 넘치게 있잖아? 설마 나한테 미안하다면서 고작 이런 것도 못 해준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야......"
타르탈리아는 입을 다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뱉으며 웃었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오히려 고작 이 정도라니, 과분한 처사였다. 그럼에도 루미네의 미소에는 사람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라도 있다는 듯이, 타르탈리아는 그 미지의 힘에 속박되어 순응 이외의 다른 말 따위는 뱉을 수 없었다.
"분부대로."
◦◦◦
어느새 타르탈리아의 주변에는 짐이 한가득 있었다.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와서 문밖에 세워둔 후, 루미네와 단 둘이서만 가게 안으로 들어가 선물을 골랐다. 물론 가게 주인의 눈까지는 피할 수 없었기에 혼자서 누군가와 대화하듯 떠들고 있는 타르탈리아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았겠지만, 감히 집행관의 심기를 거스를 어리석은 사람은 없었다. 선물이 정해지면 구매한 선물을 문밖의 부하들에게 옮기도록 지시했다. 부하들도 그의 행동을 의아한 듯 여겼지만, 미쳤다는 소문도 도는 마당에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기에 큰 의심은 없이 잠자코 명령을 수행했다.
옷집, 음식점, 잡화점, 기념품점 등... 그렇게 스네즈나야 안의 온갖 가게들을 탈탈 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루미네는 직접 선물을 제작하기 위해 재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물론 루미네의 지시를 따라 만들어야 하는 것은 타르탈리아였다. 본래 집안일을 자주 해서 그런지, 몇 번의 시도 끝에 꽤나 그럴싸한 작품이 완성되기도 했다.
"이건 누구한테 줄 거야?"
손바닥만 한 작은 등불 모형을 만들던 타르탈리아가 문득 궁금해져서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소."
"소? 별난 이름이네. 그게 누군데?"
"리월의 야차 있잖아. 항마대성."
"...나보고 리월의 선인한테 선물을 전해주라고?"
선물이 거부당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거부만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관계인데, 어쩌면 보자마자 달려들지도 모른다... 싸울 수 있는 건 좋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루미네는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는 듯 매정하게 답했고,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아 착잡한 눈빛으로 하하,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둘이서 선물만 준비하며 보내게 되었다. 타르탈리아는 아예 우인단에 휴가까지 선언하고 제멋대로 일을 쉬는 중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선물 준비를 마친 날, 루미네는 타르탈리아에게 편지를 대필해 달라고 부탁해왔다. 아마 자신이 준비한 선물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당사자들끼리만 아는 내용을 적어 마지막 인사를 전하려는 듯했다. 타르탈리아는 본의아니게 남의 비밀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최대한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도록 그대로 옮겨 적는 일에만 집중했다.
사이가 꽤나 좋아 보이는 듯한 누군가에게 전하는 다정한 말에 언짢은 기분이 들어, 무심코 내용을 바꿔 적으려다 루미네에게 들켜 싸늘한 눈초리를 받았다. 루미네는 딱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원래 소리 없는 분노가 더 무서운 법이다. 짧은 반성 후에 루미네의 눈치를 보며 남은 편지들을 채워나가니, 어느덧 마지막 순서인지 편지의 수신인에 익숙한 이름이 불렸다.
"페이몬."
그녀의 파트너의 이름이 불리자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라, 순간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쩐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페이몬, 잘 지내? 내가 준 모라들, 전부 먹을 거에 써버린 건 아니지? 나 없다고 너무 많이 먹지는 마. 그러다 너무 뚱뚱해져서 날지 못하게 되면 어떡해."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농담에, 정말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루미네는 언뜻 보기엔 무심하게 들리지만, 분명히 애정이 존재하는 목소리로 내용을 읊었다. 혼자 남게 해버려서 미안하다고. 그동안 같이 여행해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고. 전부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들이 담겨 있었다.
가벼운 단어들 사이의 감정이 너무나 무겁고,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애달픈 마음이라서... 이들을 갈라놓은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벌어진 상처를 다시 헤집어 박히듯 다가왔다. 구부러진 펜촉을 씹어 삼켜도 이보다 괴롭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페이몬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이 편지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 듣고 있어?"
"......"
"타르탈리아?"
미동도 없이 가만히 멈춘 타르탈리아를 향해 루미네가 의아한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르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너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까지도 이렇게나 냉정할까. 나는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타르탈리아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내었다.
"편지는 책임지고 반드시 전달해 줄게. 걱정하지 마."
"그래, 고마워."
안심이야. 루미네는 그렇게 작게 덧붙이고는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지는 이걸로 끝이야. 손은 괜찮아? 100통이나 넘게 썼잖아."
"물론, 끄떡없어."
"그럼 잠깐 산책이나 하러 가자."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입김이 공기 속으로 퍼졌다. 하늘에서는 느릿하게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루미네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먼저 걷기 시작했고, 타르탈리아는 부러 걸음을 늦춰 천천히 따라갔다. 그동안 잊고 살았음에도 너무나 익숙한 뒷모습을 보며 발을 내디뎠다. 차라리 이렇게 뒤따라가는 것 밖에 할 수 없다고 해도, 그녀가 자신의 시야 안에 존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타르탈리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루미네가 준 그 화분이, 미련이라는 것을. 자신이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의 의미를. 루미네는 가차 없이 버리라고 말했지만, 도저히 스스로 내칠 수가 없었다. 루미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아직도 그녀가 죽은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그가 루미네에게 품은 미련도......
루미네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후련해 보였다. 자신이 그녀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는 마지막 족쇄인 것마냥, 그 실낱같은 연결을 끊어내면 영영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남길 것 따위는 없다는 듯이. 그것에 울화가 치밀고, 분하고, 억울해서... 타르탈리아는 답지 않게 유치해지기로 했다. 마지막이라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서.
"내 거는, 없어?"
"응?"
눈을 밟는 소리만 들리던 둘 사이에, 가라앉은 미성이 울렸다. 루미네가 숨을 들이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한테는 이별 선물도, 편지도 안 줬잖아."
"뭐?"
루미네가 어이없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걸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준비하는 경우가 어딨어? 내가 말하면 네가 바로 다 듣고, 보게 되잖아."
"뭐 어때. 어차피 그런 거 신경 쓰기엔 이미 늦지 않았나?"
"너, 갑자기 왜 이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타르탈리아를 보며 루미네가 눈썹을 찡그렸다. 루미네가 평소 같은 헛소리로 치부하고 돌아서려 하는 것을 타르탈리아가 붙잡았다.
"미련 없애라며. 지금 못 받으면 평생 마음에 남을 거 같아서 그래. 어차피 너도 곧 떠날 생각인 거 아니야?"
타르탈리아는 이렇게 하면 루미네가 망설일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을 적중하듯, 루미네의 표정에서 귀찮아하던 기색이 사라지고 사뭇 진지한 눈빛이 떠올랐다. 분명 그녀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루미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타르탈리아의 앞으로 단숨에 걸어왔다.
"알겠어."
루미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며 그의 정면에 섰다. 조금 민망할 법도 한데, 무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안부는 직접 봤으니 굳이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꽤 즐거웠어. 난 거의 구경밖에 못 했지만 나름 만족했거든. 페이몬의 시점에서 보는 거 같기도 했고. 너에 대해 말해보자면 좀 꽤씸하기는 해서 한 방 먹여주고 싶기는 한데, 별수 없으니 이번엔 그냥 봐줄게. 어차피 내가 때릴 수 있었어도 넌 전투니 대련이니 하면서 신나했겠지."
"당연하지."
"내용 말하는 중에 대답하지 마."
루미네의 싸늘한 대답에 타르탈리아는 투덜거렸다. 어차피 진짜 쓰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루미네가 "관둘까?"라고 묻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타르탈리아가 조용해지자 루미네는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네가 세계를 정복하면 지켜봐 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만은 못 지키겠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어차피 서로가 서로한테 못 할 짓은 많이 한 거 같으니, 남는 건 없도록 정리하고 가자. 너도 괜히... 더 신경 쓰지는 마. 나도 그럴 거니까."
루미네답게 담백하고 참 정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런 메마름에도 그리움을 느끼게 될지 몰라 조용히 감상했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도록.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목소리를 최대한 오래 기억하도록.
잠시 할 말을 고르듯 뜸을 들이던 루미네는 고민 끝에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네가 내 삶을 가져갔으니, 뺏은 만큼 내몫까지 살아. 그럼... 잘 있어."
말을 마친 루미네는 타르탈리아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더. 더 숙여. 그렇게 둘의 눈높이가 동등해질 즈음, 루미네가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짙은 향기가 불어왔다. 이 차디찬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익숙하고, 그리운 꽃향기가.
그의 귀 옆에 무언가 속삭인 루미네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굳어버린 타르탈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타르탈리아의 어깨 위에 얹혔다. 그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줄 알았던, 마치 살아있는 듯한 촉감이 느껴졌다. 타르탈리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가 그 기적에서 미쳐 헤어나오지도 못하는 사이, 루미네는 타르탈리아의 입술 위로 짧은 입맞춤을 내리고 천천히 떨어졌다.
"이건, 이별 선물."
루미네는 마지막으로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깊이 새기며 눈을 감은 타르탈리아는 속으로 루미네를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미련을 없애주겠다더니, 이러면 더 미련이 남는데......
다시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의 설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코끝에 희미하게 남은, 이름 모를 꽃의 향기만이 이 겨울의 풍경 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