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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속의 여름

 

*화가 알베도×잡지 모델 루미네

 

 

 

 

여름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과 기분 나쁘게 습한 장마철일 것이다. 루미네는 두피가 타들어 갈듯한 땡볕 아래를 걸으며 생각했다. 오늘 잡힌 촬영을 끝내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속으로 죽겠다를 외치며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좀비 같다고 생각할 몰골로 말이다. 얇게 뜬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면 열기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장관이 확실하게 보일 정도로 날이 더우니, 사람이 자동으로 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집에 도착해서 이 더위를 찬물로 가라앉힐 생각을 하니 기운이 솟아 루미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대로 멈추지 않고 직진하면 머지않아 집에 도착할 터인데 괜한 호기심과 오지랖 때문에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이 한곳에서 멈췄다. 바로 도둑이 든 것처럼 난장판인 한 화실 앞에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아크릴 물감, 쓰러져있거나 내던져있는 캔버스들. 도둑이 든 게 아니라 망한 건가 하고 고개를 슬쩍 빼내 화실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물감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바닥 정중앙에 캔버스 하나를 올려두고 열심히 팔을 움직이는 사람 한 명이 있었다. 여기 주인인 걸까.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누군가가 횡포를 부리고 간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언제 여기에 화실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애먼 곳에 시간을 낭비했다 생각한 루미네가 그냥 지나가려던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저기."

 

"어?? 나 말하는 거야?"

 

"응. 혹시 그림 그리는 거에 관심 있어?"

 

"어.. 그닥?"

 

 

그럼 왜 거기서 멀뚱히 여길 바라보고 있는 거야? 순전히 궁금해서 묻는듯한 어투에 루미네는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화실 안이 너무 더럽길래 도둑이라도 든 줄 알고 쳐다봤어라고 말한다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 그냥 무시하고 가도 되는 걸 루미네는 심혈을 기울여 머릿속을 떠도는 변명거리 중 하나를 골라 뱉었다.

 

 

"혹시 모델은 필요 없나 싶어서."

 

"...? 사람을 정해놓고 그리지는 않아서."

 

"..필요 없다면 말고."

 

"그림 배울 생각은 없는 거야?"

 

"하는 일이 있어서 바빠.."

 

 

그렇구나, 아쉽네.. 루미네는 잘생긴 얼굴에 마음이 흔들렸다. 혹시 얼굴로 꾀어서 수강생을 모으는 그런 건가 싶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조각 같은 미남의 눈빛 때문에 안 그래도 더워서 줄줄 흐르는 땀에 식은땀까지 더해졌다. 루미네는 부담스러움에 이리저리 눈만 굴리다 그냥 화끈하게 오늘 하루만 배워보자 하고 결정했다.

 

 

"저기.. 오늘 하루만 하는 것도 돼?"

 

"얼마든지. 그리고 내 이름은 알베도야. 하루도 괜찮으니까 안으로 들어와."

 

 

안으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루미네는 냉큼 화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음에도 에어컨을 세게 틀었는지 화실 안은 시원하다 못해 추웠다. 물감이 신발에 묻지 않게 뒤꿈치를 들고 알베도에게 다가간 루미네가 캔버스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곰인형을 껴안고 활짝 웃는 아이의 그림이 보였다.

 

 

"아는 아이인가 봐."

 

"매일 화실 앞을 지나가는 아이야. 오늘따라 행복해 보이길래 그렸어. 내일 지나갈 때 선물로 주려고."

 

 

그렇다. 알베도는 지나가는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 화실 문을 열어두는 거고 모델이 딱히 필요 없다 한 거였다. 루미네는 알베도가 붓을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다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옆에 앉았다.

 

 

"완성이야. 이제 수업 시작할까? 혹시 그림 배운 적 있어?"

 

"아니, 나 잘 못 그리는 편이야.. 배운 적도 없고."

 

"그럼 당장 그리는 것보단 기초부터 배우는 게 좋겠네."

 

 

알베도가 명암 표현 및 스케치 방법 등을 루미네에게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했다. 루미네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연필을 움직였다. 하루라는 짧은 사이에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 기초를 급하게 끝낸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스케치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두 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이제 스케치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싶은 거 있어?"

 

"정해놓은 건 없어."

 

"보통은 식물이나 동물, 인물 등을 그려. 원하는 대로 편하게 선택해도 돼. 그리는 도중에 막히면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인물이면... 알베도로 할래. 괜찮지?"

 

 

루미네의 선택에 알베도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수강생도 별로 없어 보이는 마당에 자길 그리겠다 하는 사람은 본 적 없을 거다. 루미네는 본인도 왜 이런 선택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인의 행복을 그리면서 정작 자신의 행복을 담아줄 사람이 없다는 건 좀 아쉽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림을 배운 적도 없는 그녀가 하루 안에 다 그릴 가능성은 없겠지만 말이다.

 

알베도가 아무 말 없이 내미는 캔버스를 받은 루미네는 다시 연필을 쥐고 빠르게 스케치를 해나갔다. 급한 건 사실이지만 대충 하지는 않을 거다. 이왕 하는 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완벽하게 그릴 생각이었다. 루미네는 자신을 바라보는 무표정의 얼굴을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집중해버린 바람에 이미 해가 저문 것은 물론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스케치가 거의 끝나갈 때쯤이 돼서야 알베도가 루미네를 불렀다.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오는데 받아야 하지 않을까?"

 

"전화?? 헉, 망했다."

 

 

루미네가 연필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열 건 이상 쌓여있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잔소리가 쏟아질 게 뻔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몇 시인가 하고 화면에 띄워진 시간을 보니 9시였다. 루미네는 식겁하며 휴대전화를 가방에 쑤셔 넣고 캔버스와 알베도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많이 늦은 것 같아 보이네."

 

"응.. 그림 다 완성 못했는데.."

 

"내일 또 오면 돼. 근데 우산 있어? 지금 밖에 비와."

 

"뭐?"

 

 

뒤돌아 밖을 보니 사람들이 단체로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말이다. 루미네가 오늘 비 온다는 말이 있었나, 가만히 서서 그냥 맞고 가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손안에 무언가 들어오는게 느껴졌다. 남색 우산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미소를 짓고 있는 알베도의 얼굴이 보였다.

 

 

"열정 있는 수강생은 언제든지 환영이야. 우산 빌려줄 테니까 내일 또 와."

 

"저기... 일 때문에.."

 

"일 때문에 매일 오기 힘든 거면 네가 괜찮은 날에 연락 줘. 아직 완성하지 않은 그림은 내가 보관해둘게."

 

 

알베도가 루미네에게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급한 마음에 거절이고 뭐고 일단 종이를 뺏듯이 가져온 루미네는 우산을 펴고 화실 밖을 뛰쳐나갔다. 미래의 자신이 대신해 주겠지라며 떠넘긴 루미네가 신발이 젖든 말든 물웅덩이 위를 밟으면서 집까지 뛰어갔다.

 

 

 

 

 

 

루미네는 손에 잡힌 남색 우산을 바라보았다. 알베도랑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한 번밖에 보지 않았으면서 그걸 어떻게 아냐 묻는다면 그냥 눈썰미라고 대답할 것이다. 루미네는 나름 모델 일을 하면서 사람에게 어울리는 색이나 옷 등을 구별해낼 수 있게 됐다. 애초에 루미네가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기도 했다. 그래서 우산을 언제 돌려줄까. 루미네는 오늘도 어김없이 땡볕 아래에서 촬영하다 고민했다. 이따가 끝나고 돌려주러 갈까, 간 김에 완성 못한 그림도 마저 끝내고.

 

땀에 젖어 눅진해진 옷을 펄럭이면서 걸었다. 화실 안은 시원할 테니 다행이었다. 알베도가 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끔찍했을지도 모르겠다. 루미네는 저번과 똑같이 문이 활짝 열려있는 화실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에 땀이 실시간으로 말라갔다.

 

 

"어서 와, 며칠만이네. 그림 완성하러 온 거지?"

 

"응. 우산도 돌려줄 겸."

 

 

루미네가 우산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알베도는 미완성했던 그림을 꺼내 루미네의 손에 쥐여주었다. 보관을 잘 해둔 건지 먼지 하나 쌓이지 않고 깔끔했다. 루미네는 스케치를 다듬어주겠다는 알베도의 말을 거절하고는 채색할 준비를 했다. 수강료까지 내고 삐뚤빼뚤한 그림으로 끝내는 건 돈 아깝지 않나 싶을 수도 있는데, 루미네는 본인이 만족하면 그만이라 여기기에 상관없었다.

 

사실 그냥 그림이었다면 도와달라 했을 텐데, 캔버스 안의 모델이 바로 알베도인지라 냉큼 손봐달라 하기에는 조금 그랬다. 그리고 루미네는 이 정도면 꽤 괜찮게 그린 것 같지 않나 싶었다. 짧게나마 받았던 기초 수업이 자신에게 많이 도움 되었던 것 같다 생각하며 말이다.

 

 

"돈까지 내고 받는 수업인데 거절할 줄은 몰랐어. 네가 싫다니 강요는 안 할게. 채색은 어떤 걸로 할래? 수채화, 유화, 아크릴화 중에서 하나 골라봐."

 

"음... 아크릴?"

 

"좋아."

 

 

루미네는 의자에 앉아 붓을 들고 알베도가 꺼내준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하나하나 색을 입힐 준비를 했다. 알베도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루미네는 그가 전에 우산을 건네줄 때처럼 미소 짓고 있기를 바랐다. 알베도는 사람들의 행복을 그린다고 했다. 루미네도 그러고 싶었지만, 상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행복함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베도가 행복하다 느낄 때는 언제야? 역시 그림을 완성했을 때이려나."

 

"응, 그림을 완성했을 때나 디저트를 먹을 때?"

 

"....그래? 그럼 나 여기서 채색 멈출래. 오늘은 여기까지!"

 

"갑자기 왜? 혹시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

 

 

루미네는 의문을 던지는 알베도를 무시하고 고민했다. 디저트 먹을 때 행복하다 했으니 날 잡고 카페에 끌고 갈 생각이었다. 어느새 알베도를 그리는 것에 진심이 되어버린 루미네는 어떻게든 저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할 생각으로 불탔다. 원래부터 한 가지 일에 꽂히면 만족할 때까지 파고드는 성격인지라 대충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시간 비는 날 알려줘. 거기에 맞춰서 촬영 날짜 조정해 볼게!"

 

 

앞뒤 다 자르고 뱉은 말에 알베도가 왜 이러는 걸까 싶은 의미를 담아서 루미네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눈으로 봐도 평소에 자주 가던 디저트 카페면 좋아할까 아니면 수제로 만든 걸 좋아할까 하며 앞으로의 일정을 짜느라 정신없는 루미네에겐 닿지 않았다.

 

 

"내가 디저트 카페 알아 올 테니까 같이 가자. 알베도가 웃는 걸 찍은 다음에 스케치를 수정하고 채색을 완성할 거야."

 

"루미네.. 네가 이렇게 그림에 진심일 줄은 몰랐어."

 

 

알베도는 루미네가 본인을 그리는 것에 이리도 진심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루미네는 왜인지 모르게 감동받은 듯한 그의 표정에 부끄러워졌지만, 알베도가 좋다면 된 거겠지 하고 넘겨버렸다. 루미네는 앞치마와 팔토시를 벗어 정리하고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화실을 나갔다. 같이 만나 디저트 먹을 생각에 들떠 찔듯한 더위 속에서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알베도의 시간에 맞춰 촬영 날짜를 미룬 지금. 루미네는 알베도와 함께 디저트 카페에 와있었다. 걸어오는 내내 찜통 같은 더위를 버티느라 체력이 반쯤 깎여나간 느낌이었다. 루미네는 아이스팩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쓸데없는 소지품을 줄인다고 거의 다 놓고 왔더니 지갑하고 휴대전화밖에 없었다. 가게안으로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루미네가 한숨을 쉬었다.

 

앉아서 녹아가는 루미네를 보던 알베도가 그녀의 손등 위를 살짝 두드렸다. 마치 정신 차리라는 듯이. 알베도의 체온이 낮은 편인 걸까. 순간 닿은 손가락이 시원해서 더위가 그나마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시원함이 좋았던 루미네가 멀어져 가는 손을 붙잡아 볼에 가져대고 비벼댔다. 알베도는 그녀의 예고 없는 행동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움찔댔다.

 

 

"시원하다.. 너 손이 차가운가 보네."

 

"체온이 낮은 편이긴 해. 근데 언제까지... 볼에 비빌 거야?"

 

"아 미안..!"

 

 

루미네가 급하게 얼버무리며 알베도의 손을 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 위를 보니 여러 조각 케이크들과 타르트, 쿠키, 마카롱 등등 디저트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더위에 흐물거릴 동안 알베도가 카운터에서 가져왔나 보다. 눈앞에 놓인 아이스 라테를 한 모금 마시니 몸에 시원함이 퍼져나갔다. 루미네는 빨대로 얼음들을 휘저으며 알베도의 얼굴을 구경했다. 맛있기로 유명한 집으로 데려와 디저트를 먹였음에도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상상했던 싱글벙글의 얼굴이 아니었다. 루미네가 뚫을 기세로 쳐다보는 게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숙이고 있던 알베도의 고개가 올라왔다.

 

 

"너는 안 먹어?"

 

"먹을거야. 그나저나 디저트 좋아한다면서 왜 그렇게 무표정이야?"

 

 

루미네는 디저트 먹을 때 행복하다면서 전혀 웃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알베도 때문에 괜히 한숨만 나왔다. 언제든지 사진 찍을 생각으로 켜둔 카메라 앱이 쓸모가 없어졌다. 결국 무표정인 얼굴로 그림을 완성해야 하나 보다. 루미네는 뚱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쿡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좋아하는 단맛이 자길 위로해 주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루미네는 다음 기회에 수제 디저트로 공략해 봐야겠다고 여름 날씨같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짐했다.

 

 

"근데 너도 잘 안 웃는 것 같은데."

 

"내가?"

 

"응. 항상 진지한 얼굴이야."

 

 

진지한 얼굴이라는 말에 루미네가 걱정했다. 설마 평소에 인상 쓰고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해 보니 루미네도 알베도 앞에서 웃은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종일 바보같이 실실 웃을 수는 없지 않나. 속으로 투덜대는 루미네를 알베도가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 루미네는 혼자 눈치를 보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알베도는 루미네의 억지웃음을 보더니 눈을 옆으로 돌렸다.

 

 

"뭐야 그 반응은... 내 미소가 이상해?"

 

"그럴 리가. 다 먹었으면 돌아갈까? 혹시 다른데 가고 싶은 곳 있어?"

 

"어.. 딱히 정해놓은 건 없는데.."

 

 

디저트 먹일 생각만 하고 그 뒤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실패를 곱씹던 루미네는 디저트 카페를 나와 조용히 알베도가 이끄는 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익숙한 화실 앞이었다. 루미네는 이왕 만남 김에 더 놀자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더 이상 그의 시간을 뺏을 수는 없어서. 게다가 자신은 내일 촬영도 있으니 말이다. 다음에 그림 완성하러 갈게. 그리 말하려 했지만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제법 답답할 만도 한데, 루미네가 입을 열 때까지 알베도는 그 어떠한 재촉 없이 기다렸다. 헤어짐이 아쉬웠던 루미네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말했다. 

 

 

"알베도."

 

"응?"

 

"그림... 다 그리고 나서도 가끔 생각나면 화실 놀러 가도 돼?"

 

 

루미네는 알베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그에게 의문 모르게 끌리는 이 상황이 싫지 않고 좋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알베도는 다를 테니 물어봐야 했다. 조금 특이한 수강생과 화실 주인의 관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과 허락이 필요했다. 시끌벅적한 거리의 소리가 가라앉았다. 루미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에 걸린 가방끈을 매만졌다. 그냥 일개 수강생인데다 그림이 완성되면 더 이상 만나지도 않을 사이. 기간을 연장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놀러 가겠다 했으니 어찌 보면 업무 방해하겠다는 예고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루미네."

 

"....으응?!"

 

"시간 상관없으니까 언제든지 놀러 와도 돼. 원한다면 다른 그림 그려도 좋고. 수강료는 따로 안 받을게."

 

 

알베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루미네는 금색 눈을 감았다 뜨며 말간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든지 놀러 와도 된다니. 그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쁜 대답이었다.

 

 

 

 

 

 

 

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일주일 내내 퍼부으면 모를까 이번 여름 장마철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야외촬영이 급하게 취소되었고 루미네는 스태프들과 함께 건물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촬영 때문에 알베도를 못 본 지도 꽤 되었다. 루미네는 무의식적으로 가방에 손을 찔러넣었다. 우산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이대로 맞고 갈 수도 없고, 전화로 데리러 와 달라 하면 와줄까. 지금 루미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알베도였다. 솔직히 가족을 부르면 바로 달려와 줄 텐데,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대이기도 하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알베도가 한가하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 아마도. 루미네는 단지 알베도의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루미네가 가방 안을 뒤적거리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주소록에서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알베도의 번호를 미리 외워놓았기에 주저 없이 키패드를 눌렀다. 몇 초의 연결음이 지나고,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미네? 오랜만이네, 오늘 화실로 올 거야?"

 

"그게.. 지금 비가 오는데 우산을 안 가져와서.. 괜찮다면 데리러 와줄 수 있어?"

 

"데리러 갈게. 위치는 문자로 보내줘."

 

"알았어!"

 

 

뚝 하고 끊긴 전화에 루미네가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야외촬영이 목적이었는데 비가 이렇게 오니 취소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루미네는 스태프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멍하니 서서 정면만 바라보고 있으니 저 멀리서 익숙한 색의 우산이 보였다. 알베도의 남색 우산이. 루미네가 반가움에 인사하려던 찰나 알베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 맞았어?"

 

 

무표정한 얼굴 위에 걱정이 스쳤다. 루미네는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 기분이 좋기도 동시에 이상하기도 했다. 상대가 알베도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걱정 받는 건 좋지만 그걸 떠나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빨리 뛰었다. 루미네는 내심 설렜으면서 태연한 척 물었다.

 

 

"걱정하는 거야? ...오늘 야외촬영이 있어서 밖에 있다가 맞았어."

 

"촬영?"

 

"응. 나 모델이거든 알베도는 잡지 같은 거 잘 안 봐? 거기에... 아."

 

 

옆 테가 뜨거워 고개를 돌리면 흥미롭다는 듯이 구경하는 스태프들이 서 있었다. 말 그대로 유리문만 밀어서 건물 밖으로 나온 거였기에 안쪽에서 두 사람이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남의 연애가 재밌다고 루미네와 알베도를 번갈아 보며 눈을 단체로 빛내는데 아쉽게도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다음 촬영 때 귀찮아 질 것을 상상한 루미네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많이는 안 젖은 것 같아 다행이지만, 일단 화실로 돌아가자."

 

"응.."

 

 

알베도가 루미네를 우산 안쪽으로 이끌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신발 안에는 빗물이 새어 들어가 양말이 전부 젖고 비가 내림에도 후덥지근해서 습한 공기 때문에 짜증만 냈을 텐데, 아까부터 빠르게 뜀박질을 해대는 심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짜증은커녕 오히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비가 와서인지 도착한 화실 문은 닫혀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둘을 맞이했다. 루미네가 에어컨을 틀어달라는 눈빛으로 조르자 알베도가 안된다는 단호한 말로 다그쳤다. 별로 젖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자동으로 축 처진 루미네가 의자에 앉았다. 습한 더위에 이 상태로 녹아서 흘러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루미네가 쳐진 상태로 뚱한 표정을 짓자, 알베도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안돼. 좀 있다 에어컨 틀어줄게."

 

"알았어.."

 

"그림 마저 완성할 거야?"

 

"응.. 이왕 온 김에 완성할래."

 

"물감이랑 붓 준비해 줄게."

 

 

알베도가 물감을 준비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루미네는 움직이는 그의 등을 눈으로 좇다가 앞에 놓인 캔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까 스케치가 많이 지저분한 것 같기도 하다. 준비를 끝내고 맞은편에 앉은 알베도를 뒤로 루미네가 붓을 들고 채색을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얼굴을 확인해 보면 여전히 굳어있는 입술이 보였다. 포기하고 채색을 진행할까 아니면 미소를 지을 때까지 기다릴까. 루미네는 긴 고민 끝에 그냥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기껏 소개해 준 디저트를 먹고 나서도 무표정이었고, 지금 당장 웃어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알베도가 했던 말대로 행복은 찰나와 같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손꼽아 기다려 봤자 의미가 없었다.

 

 

"알베도. 나 다 끝났어."

 

"그래? 나도 완성했어."

 

"너도 그리고 있었어?"

 

"응. 이전에 채색 못한 그림이야."

 

 

무슨 그림일까. 루미네는 완성한 캔버스를 들고 알베도에게 다가갔다. 우중충한 오늘과 달리 화창한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었다. 그림 속의 여자는 웃는 얼굴로 통화를 하며 걷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고, 머리카락 색은 밝은 금색인.... 어? 루미네는 다른 사람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본인이었음에 놀라 멍해졌다.

 

 

"이거 나 아니야? 이 꽃다발이면... 너 만나기 전인데.."

 

"여기에 화실이 들어선 지 꽤 오래 지났다는 걸 몰랐나 봐.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너는 항상 앞만 보고 걸었거든."

 

"아,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스케치를 완성한지는 꽤 되었는데, 막상 채색하려고 하니 어려웠어. 넌 항상 굳어있고 지쳐있었으니까."

 

 

그림에 새겨진 장면은 찰나지만, 그 장면에 입혀지는 건 루미네 본연의 색이었다. 그렇기에 알베도는 그녀가 이 화실에 관심을 가졌을 때 꼭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에게 있어 일하다 지친 모습이 아닌 다른 걸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알베도는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그림 속 주인공에게 행복을 선물할 수 있게 되어 누구보다 기뻤다.

 

 

"....근데 알베도가 그린 거에 비해 내건 너무 삐뚤빼뚤한데.."

 

"그게 중요해? 나는 네가 그린 그림이라 그저 좋은데."

 

 

알베도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루미네는 피어나는 미소에 시선을 빼앗겼다. 입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고, 한번 접혔다 떠진 눈은 놓치지 않고 루미네를 비추고 있었다. 이에 막을 새도 없이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왜, 왜 그림 다 그리니까 웃는 거야?! 웃는 모습 그리고 싶어서 안달 낼 때는 무표정만 지었으면서! 웃는 건 본인 마음인데 루미네는 애먼 곳에 화풀이를 시작했다.

 

 

"열나는 거 아니지?"

 

 

알베도가 루미네의 붉은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누가 봐도 놀리는 어조였지만 루미네는 이 설레는 마음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느라 바빠 화를 내지도 못하고, 끝끝내 쥐구멍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놀리지 말라며 루미네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알베도는 그녀의 투덜거림에도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날 그려줘서 고마워."

 

"....네가 행복한걸 그리고 싶었는데."

 

"그림 속의 나는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 걸. 너무 낙담하지 마."

 

"웃는 얼굴을 그리고 싶어서 수제 디저트라도 만들어 줘야 하나 고민했었어. 솔직히 효과는 없었겠지만.."

 

"그건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 아닐까. 다음에 만들어줘. 분명 카페에서 먹은 케이크보다 맛있을 거야."

 

 

어찌 보면 그림과 디저트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관계의 연결선과 같았다. 그렇기에 알베도는 다음이라는 미래를 기약했다. 비록 서로 만난 시간이 짧다 할지라도 이 관계가 좀 더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그가 쥐어짜낸 용기였다. 

 

 

"당연하지. 내가 만든 디저트니까."

 

 

루미네가 콧방귀를 뀌며 자신 넘치게 말하니, 알베도가 미소를 지었다. 루미네는 그가 이렇게 자주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싶었다. 아니면 자신이 알베도한테 웃긴 사람이라던가. 그래도 활짝 핀 얼굴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예뻤으니 봐주기로 했다.

 

 

"내일 또 올 거야?"

 

"응. 모레도 올 거고 시간 나면 데이트 신청도 할 거야."

 

"기대하고 있을게."

 

 

책상 위에는 반듯하고 깔끔한 그림과 모든 게 서툰 듯 얼룩져있는 그림이 함께 놓여있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화실 가운데서 귓가에 들려오는 빗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퍼붓듯이 내리던 비가 어느 순간 약해지고 여름 장마철의 끝이 다가오는 걸 알렸다. 한풀 꺾인 더움 사이로 캔버스 위에 두 사람의 새로운 인연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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