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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루미 티팟.png

표묘선연

零.
종려는 눈꺼풀을 더디게 깜박였다. 마치 수면 아래로 깊숙이 잠긴 것 같은 기분. 드물게 손끝을 잠식하는 무력함에 종려는 열 번째 종이를 태웠다. 먹으로 쓰인 한자가 불길에 부질없이 사라졌다.

유서 작성은 제법 오래된 왕생당의 '이상한' 행사였다. 거의 사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만 77대 당주가 이런 흥미로운 이벤트를 놓치겠는가? 왕생당 앞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난데없이 당주에게 붙잡혀 짤막하게나마 유서를 적었다. 석일과 달리 직접 종이를 고르고 먹을 갈아 정갈하게 말을 남기는 차례는 사라졌지만 다가오지 않은 죽음을 상상하는 인간이 슬픔에 잠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라, 리월항의 동편과 서편을 잇는 붉은 다리 앞에는 별안간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월항 전역이 우울함에 잠기기 직전에 총무부는 천암군을 동원하여 인파를 흩트렸다.

왕생당 장의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장례가 적었고 장의사들의 휴식 시간이 길었다. 장의사들은 당주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들고 한참 동안 그 하얀 미색지를 쳐다보다가, 바깥의 사람들보다는 담담하게 확정된 미래에 대한 예언을 적어 내렸다.

그러니 종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호 당주가 한가득 건넨 종이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을 넣어 먹을 갈아 하얀 세붓을 집어 들었다. 우이필의 하얀 털이 까만 먹을 흡수해 회색으로 물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장의사복 소매를 붓을 쥔 반대 손으로 걷어내고 몸을 숙였다.

달필로 적어 내려간 유서遺書.
그리고 종려는 잠시 긴 침묵을 가졌다.

 


一.
매화가 애섧게 피는 계절이었다. 운래해의 바다는 고요했고 하늘마저 조용한 날이었다. 선인의 몸으로 세상의 모든 진동을 감각하던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조용한 날이 기이했다. 종려는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왕생당 앞에 심어진 단풍나무에서는 풋내가 났고 다리 아래를 지나는 민물과 바닷물의 경계선에선 비린내가 났다. 정말 기이할 정도로 섣부른 평화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 종려 씨."
"… 여행자, 오랜만이야. 당주를 찾으러 왔어?"

담박한 향이 미끄러졌다. 고고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산에서 난다는 향이다. 종려는 고개를 숙여 햇빛을 닮은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예상꽃을 한가득 안고 있던 루미네가 겸연쩍게 웃었다.

"네, 호두에게 볼 일이 있는데… 호두는, 바쁜가요?"
"아니, 아마 안쪽에서 자고 있을 거야. 안내해주지."
"리월항이 조금 소란스럽던데요."
"역시 왕생당의 일일세. 가서 들어보면 당주가 전말을 이야기 해 줄 거야."

당주가 벌인 일이니 그녀가 직접 설명하는 것이 더 빠를 터였다. 단단한 손이 당주실의 미닫이문을 열자 매화향이 훅 끼쳤다. 종려는 몸을 틀어 공간을 내었다. 빈 곳에 몸을 밀어 넣은 루미네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호두-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여즉 다정하다. 종려는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감정이 가슴 속에서 느리게 가라앉았다. 새벽녘 공기가 햇빛에 가라앉는 것처럼, 익숙지 않은 것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처럼.

춘람春嵐이 지나고 나면 왕생당의 일손은 바빠진다. 인간의 장례를 담당하지 않는 객경마저 팔을 걷어붙이는 때가 온단 뜻이다. 당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종려는 그 뒤를 묵묵히 따르며 장례 절차의 상세한 부분을 채워 넣었다. 얼추 예식이 마무리되었을 즈음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지친 채 조용히 맹물을 홀짝일 뿐이었다. 그중에 종려 홀로 온전했다.

"선생은… … 초인이야?"
"아닙니다.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당주.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싫어요. 여기서 잘래."
"불복려에서 의사가 오는 걸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에잉 쯧.."

호두가 큰 소리로 혀를 찼다.

왕생당의 업무는 리월의 성수기와 엇갈리는 경향이 있었다. 리월이 바빠지면 왕생당은 한가해졌고 왕생당이 분주해지면 리월이 조용해졌다. 종려는 그 달 당주의 앞으로 온 꽃다발을 정리하느라 손을 바삐 놀렸다. 이건 유리주머니, 저건 청심, 어린아이가 어설프게 들판에서 꺾어 만든 작은 꽃다발. 종려는 그 작은 꽃을 당주의 시야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어라, 오늘은 예상꽃 향이 진하네요."
"금옥장교는 아닙니다."
"그럼 표묘선연이겠죠, 뭘. 왕생당에 누가 산음금족을 주겠어요? 향이 너무 진해서 다들 도망갈 텐데."

누가? 귀신들이요. 호두의 긴 손이 들꽃을 매만졌다.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이 관을 매만질 때처럼 다정했다. 귀신들은 타고나기를, 나기를? 아무튼, 전체적으로 흐리잖아요. 옅고. 그래서 진한 것이 가까워지면 울면서 도망가요. 산자가 망자를 기만하러 왔노라고.

호두의 시선이 종려를 향한다. 그래서 서랍장 아래에 제일 산음금족 놓아둔 거 아니에요?

 


二.
종려 씨 전 상서.
저희는 지금 폰타인에 있어요. 수로가 굉장히 잘 발달한 도시인데... 전체적인 색 배치가 타르탈리아를 떠올리게 만들어요. 아, 이건 너무 갔으려나. 그래도 타르탈리아가 왜 물의 신의 눈을 받았는지 이해가 될 법한 나라긴 해요.

리월은 지금 한창 축월절 준비를 하고 있을까요? 폰타인은 곧 추수 감사절이래요. 원체 물이 많은 나라라 농사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올해는 그중에서도 풍년이라서 이번에 성대하게 연다고 했어요. 특별 사면이 있을 예정이고, 그리고… … 맞다. 소등을 물 위에 띄운대요. 추모의 의미를 가지는 행사라고 했어요. 오랜 사람들을 기리고 새로운 빛을 맞이하는 행사. 이건 리월의 해등절과도 많이 닮았네요.

이번 축월절에도 요리 대회를 열까요? 이번에도 향릉이 참가하지 않을까요? 직접 가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는 게 아쉽네요. 종려 씨도 같이 이 빛을 보면 좋을 텐데.

… … 종려 씨, 저, 이다음엔 나타로 가요. 그리고 그다음엔 스네즈나야로 가겠죠. 뜨거운 싸움의 나라를 지나서, 신이 사랑하지 않은 설국으로 가게 될 거예요. 같이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게 제 일만 아니었어도,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관광 가이드를 부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느긋하게, 아무도 모르는 -종려 씨 빼고요!- 전설과 설화를 이야기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 … 여행을 했겠지요. 제가 아는 사람도 오랫동안 친구와 여행을 했었대요.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 이만 나가야 해요. 빛을 올리기 위한 준비가 좀 많아서,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모험가 길드에서 주최하는 행사도 좀 봐줘야 하고. 한동안은 폰타인과 수메르를 오갈 것 같으니, 답장은 모험가 길드로 보내주세요. 나중에 봐요!

당신의 오랜 친구, 티바트의 역사를 기억할 살아있는 '예비본', 루미네 올림.

추신. 동봉한 꽃은 폰타인의 국화國花에요. 정의를 뜻한대요.

 

여행자 전 상서.
편지 잘 받았네. 내가 쓰고 있는 이 편지를 모험가 길드에 부칠 무렵엔, 축월절이 거의 끝나가 있을 거야.

올해의 요리 대결 주제는 객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 다만 몇 년 전의 주제가 자연, 선인과 같은 거시적인 것들이었다면 이번엔 인간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미시적인 것들로 바뀌었다는 점이 다르지. 이번엔 망서 객잔의 언소가 승리했어. 연년승한 향릉이 자신은 다른 요리사들의 도전 기회를 박탈하는 것 같다고 기권을 선언했거든. 참 멋진 정신이지 않니.

그래, 올해의… … 리월은, 정말로 다사다난했어. 항구도시가 조용하지 않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겠지만. 천권성이 바위 원소 신의 눈 소유자가 만들어낸 바위 원소 창조물에 관한 관세를 철폐하겠다는 새 법안을 내놓았고, 으레 그랬듯 그 법안은 티바트 전역의 무역법에 적용이 되었지. 그래, 보석에 대한 관세가 완전히 없어진 셈이야. 천권은 이걸로 모라를 더 벌어들이겠지.

오랜 노력 끝에 조폐창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어. 황금옥 지하 깊숙한 곳에 있을 타르탈리아의 사념이 너희에게 안부 전해달라 하더군. 예년부터 발행될 모라는 신의 피와 살을 매개로 하지 않는, 오롯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모든 마법과 마술의 매개체가 될 거야. 티바트는 천천히 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있어.

폰타인의 추수 감사절이라. 풍년과 행복을 기원하는 오랜 풍습이지. 내 기억하기론 첫 번째 물의 신이 집권할 때부터 그런 축제를 열었을 거야. 물이 많은 국가는 말 그대로 물이 너무 많아, 농사엔 적합한 땅이 부족하니까. 빛 축제도 장관이지. 주정뱅이 시인이 날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볼거리가 제법 많았어. 그것도 꽤 옛날 일이니 지금 보면 네가 즐길 것은 많을 거야.

그래, 여행이라… …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너와 아주 오랫동안 여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단 생각이 들어. 우리만이 아는 설화를 이야기하면서, 허공에 수놓인 별들에 얽힌 전설을 노래하면서… 그리, 티바트를 떠돌아다녔을 수도 있겠지. 내 길을 비추어주는 것이 너였을 거야.


그럴 때가 있음을 고대하고 있겠네. 너와 대화하고 순회하는 것은 나에게 많은 감정을 가져다주어. 우린 좋은 여행 파트너가 될 거야.

이만 줄여야겠군. 호 당주가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했거든. 그래, 리월에 들르거든 나중에 보자.

왕생당 객경, 당신에게 오랜 신뢰를 맡긴 사람, 종려.

추신. 올해 핀 표묘선연 중 가장 향이 부드러운 걸 동봉하네. 그대를 닮았어.

 


三.
미안합니다. 유품은 알아서 처리해주십시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유서가 작게 보였다. 여행자는 이제 스네즈나야의 일을 겨우 끝마칠 무렵이라고 했다. 이는 즉 제 오빠를 찾는 기나긴 여정의 끝매듭을 지을 시기란 뜻이다. 왕생당은 삶의 매듭을 짓는 곳이다. 호두는 어떤 시기의 완결을 짓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왕생당 종려 선생의 부고 소식은 활기찬 리월항을 바다 아래로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늘 들떠있던 공기가 무겁게 여린 피부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호두가 왕생당 바깥을 나서면 모든 천암군과 모든 상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같잖은 위로는 가당찮다. 호두는 그 짤막한 장례 의식에 화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우리의 벗 종려 선생께서 연세하시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부고란 가볍기 그지없었다. 영혼의 무게란 으레 그런 것이라 종이를 쥔 호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부고는 리월항 모든 곳, 종려를 아는 모든 곳으로 향했다. 열흘 뒤 해시亥時에 그의 장례를 치를 예정이오니 부디 왕생당으로 오시어 그의 평안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 그 문장을 직접 적어 내린 붓 끝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종려가 옆에 있었다면 그런 늦은 시간에 장례를 올리는 것은 조문객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며 무어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종려는 리월에서 가장 귀한 주목나무로 짜 맞춘 관에 들어갔다. 원체 훤칠한 자라 일반적인 관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평소 자주 입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장 대신 수의를 입히고, 그 주변에 평소에 사랑했던 꽃들과 보석과 별소라를 넣고, 누군가의 기원이 가슴께 위에 곱게 얹힌 종려의 손에 가 닿았다. 호두는 직접 모든 장례 절차를 지휘했다.

서신이 스네즈나야에 가 닿은 지 닷새 만에 여행자가 왔다. 정말 스네즈나야에서 바로 온 건지 어깨 위엔 리월에서 보기 드문 눈이 쌓여있었고 겉옷은 털을 안감에 바른 옷이었다. 안쪽 깊숙이 보이는 붉은 주목나무 관을 본 루미네가 그대로 무너졌다. 첫째 날에 온 바람신이 그녀를 부축했다. 바람에 등 떠밀려 겨우겨우 관 앞으로 다가간 루미네는 관을 붙잡고 다시 무너졌다. 억눌린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왕생당을 뒤흔들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신이 바람결에 흩어지고 호두가 문을 닫았을 즈음에 루미네는 관 속에 반쯤 몸을 파묻은 채 엉엉 울고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을 끈 것이 무색하게 종려의 관이 불길 안으로 들어가 온전히 재가 되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억겁 같은 몇 분이 지나고, 호두는 직접 잿더미를 뒤져 뼈를 골라내어 유골함에 담았다. 유서에 제 장례를 어떻게 치러달라는 말 한마디 없었으므로 모든 건 호두의 독단이었다.

"… … 이건, 절운간에 안치해둘까 해."
"여행자."
"종려 씨는 선인이었으니까. 가끔 절운간이 좋겠다 이야기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사랑한 것들은 전부 날 울게 만드는구나. 이내 햇빛이 흐느꼈다. 표묘선연의 줄기가 일그러졌다.

 


四.
벤티는 직접 바람 한 줄기 통하지 않는 어둑한 층암거연의 심층을 헤집었다. 리월 땅 밑에서 사는 오래된 바위 원소 생물은 대부분 눈이 안 보이고 수천 년 동안 해를 본 적이 없어. 벤티가 단 한 번도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서 웅얼대었다. 노래하듯 처절했다가 천둥처럼 매서운 그윽한 소리를 들으면 나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또 한 번 머릿속 종려가 웅얼댄다. 시끄러워, 꼰대. 그렇게 가 버렸으면서 누구에게 훈수를 두는 거야? 벤티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단단한 화강암을 세 갈래 화살로 꿰뚫었다. 암석이 형편없이 박살 나고, 그리고… ….

"아하, 빙고!"

제군께서는 그 돌의 영성을 귀히 여기시어… … 이제 벤티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바람결에 얼핏 들었던 리월 만담꾼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공기 하나 통하기도 어려운 갱도를 성큼성큼 걸어간 벤티는 웅크린 팔을 잡아채 일으켰다.

"여, 모락스~ 간만에 깨어난 기분이 어때?"
"… 그런 소리를 하려거든 내게 눈부터 돌려주는 것이 어때."

캄캄하게 쉰 목소리가 우렁했다.

내리감은 눈꺼풀과 머리칼에 엉킨 돌가루를 씻어내고, 온몸에 흐르는 바위 원소를 다시 안으로 밀어 넣을 때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억겁의 시간 끝에 깨어난 모락스는 힘의 조절엔 무식하기 그지없었다. 손 한 번 휘두르면 산이 뒤흔들렸고 숨 한 번 내쉬면 돌비가 내렸다. 신의 눈이 없는 지금의 인류가 견디기엔 지나친 재앙이라 얼음 여왕은 그 돌비에 얼음을 둘러 우박을 만들었다. 난데없는 이상기후는 그런 이유에서 발생했다.

"모락스, 모락스."
"산음금족은 여기 두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네가 죽은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지? 아, 맞다. 절운간에서 살 거지?"
"아마도 그렇겠지. … 그리고 난 죽었어, 바르바토스."
"'인간 종려'는 안 죽었지. 방금 태어났잖아?"

벤티가 싱글싱글 웃었다. 손을 뻗어 성인치고 말랑한 볼살을 쭈욱 잡아당겼다가 만지작거리는 것이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 종려가 미간을 좁혔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제법 불편했다. 예전과 달리 그에게 눈을 부여해줄 수 있는 사람은 티바트엔 없었으므로 그는 이제 제 목을 매만지는 벤티의 손을 쳐내고 주변을 더듬어 지팡이를 찾았다.

"모락스!"
"그러니까 그 이는 죽었대도."
"오늘 절운간에 호 당주가 간대."
"… … 참고하지."

 


五.
여행자는 꼬박꼬박 절운간에 왔다.

으레 삼천의 별바다를 건너는 여행자의 시간 감각이 일반인의 것과 똑같은 것이 만무한지라 루미네의 헌화 주기는 일반적인 것을 까마득하게 벗어났다. 그래서 항상 벤티나 라이덴이 불규칙하게 돌아오는 그녀를 맞이했다. 그해 가장 운무가 자욱하던 산에서 난, 가장 부드럽고 담박한 표묘선연을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둔 채 그녀를 맞이했다. 루미네는 오랫동안 바람결에 관리된 청백색 묘비를 몇 번이나 쓸고 닦은 다음, 이제는 그 어떤 인간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을 일찰나 되새기고는 다시 별바다를 향해 떠나갔다.

검은 장갑을 끼고 엄지에 반지를 낀 손이 느리게 위패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단 말인 반대로 말하자면 다른 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해있다는 말과 같다. 초봄을 알리는 매화향에 파묻힌 채 종려는 그가 죽었음을 반추하는 물건의 음각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떠올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있는 기억에서 숱하게 나타났던 이름이 그의 끝에서 되살아났다가 죽기를 반복했다.

지팡이를 내려두고 완전히 쪼그려 앉자 잔디가 아침 이슬을 흙바닥에 떨어트렸다. 길게 늘어트린 고전식 겉옷이 물을 머금어 젖는 감각이 기이했다. 종려는 더듬거리며 위패 주변에 가득한 꽃을 정리했다. 이건 유리주머니, 저건 청심, 어린아이가 어설프게 들판에서 꺾어 만든 작은 꽃다발. 봄에 피지 않는 것들이 가득한 위패 끝에서 유일하게 나는 봄의 향은 예상의 것. 그리고 이건….

"종려 씨."
"… … 루미네."

흙바닥에 주저앉은 제 바로 옆으로 오는 발걸음이 조급했다. 루미네는 몇 번이나 넘어지려는 것을 겨우 버티며, 종려의 품을 가득 채우는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그래, 이건 유리주머니, 저건 청심, 귀인이 곱게 적화주에서 꺾어온 보랏빛 말총, 요광 해안의 바다를 담은 별소라, 오래간 수많은 사람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유리백합, 그리고, 그리고… ….

종려를 닮은 예상꽃.
루미네를 닮은 표묘선연.

고고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은 종려를 닮았고 오래가는 담박한 향은 루미네를 닮았다. 새벽의 새가 우짖을 찰나 둘의 손이 엇갈렸다. 마른 손이 서로의 뺨에 가 닿기 무섭게 예상화를 짓이겨 낸 붉은 물이 눈가에 긴 선을 그렸다. 아, 그래. 빛이다. 나를 이끌, 나를 데려갈 빛이 거기에 있었다… ….

"루미네."
"종려, 종려 씨. 내가, 당신을, 당신을-"
"… 내 길을 밝힐 빛이 너였지."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남겼어요. 오래간 여행하고 싶다면서, 왜 먼저 갔어요. 왜,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 울적한 소리가 어깨에 묻혀 사라졌다. 과분한 빛을 끌어안은 종려가 느리게 숨을 토해냈다.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하네. 나도 너를, 그대를… … 여행의 끝에서 맞이하고 싶었어.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워. 속삭이는 말이 여즉 다정하다. 종려가 그랬듯 무거운 감정이 루미네의 가슴 속에서 느리게 가라앉았다. 새벽녘 공기가 햇빛에 가라앉는 것처럼, 익숙지 않은 것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처럼.

틈새를 비집은 운무가 그들을 감쌌다.
기이할 정도로 짙푸른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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