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月下
한계는 욕망을 놓지 못하고 손을 힘껏 내뻗으니
태생胎生이라는 것 자체가 본디 고난으로서 작용하는 법도 있는 것이다. 유전遺傳이라는 것은 지독하게 세포 내에 들러붙는 것. 붉디 붉은 주단朱丹의 입안 점막에 엉겨 붙어 침의 점성까지도 결정해 버리는 것. 유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란 본디 없을 것이 분명할 터이니. 휘영청 떠오른 달 아래 노란 꽃술 사이에서 날아오른 루미네가 무던한 낯으로 생각하였다. 꽃의 술을 중심으로 새의 깃이 층층이 돌려 꽂혀 있는 모양을 한 꽃-月下美人. 그것이 루미네가 적을 담고 있는 꽃의 이름이었고, 루미네를 가두고 있는 창살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가시 없는 선인장에 매달려 피어나 수직선數直線과 포물선抛物線 그리고 곡선曲線의 조화를 보이며 ‘아름답게’ 피어 있는 자신의 하얀 감옥. 그 감옥은 일년에 단 한번, 밤이 시작되는 해시亥時에 문을 열어 루미네를 내보낸다. 급작스레 떨어진 새로운 세계에서, 잃어버린 오라비를 찾는 루미네는 자신에게 허락된 극히 짧은 시간에, 그 태생적 한계에 이를 바득 갈면서도, 이따금 메마른 눈가를 쓸어보면서도- 오목히 입을 닫은 꽃잎 사이에서 까무룩 잠들기 전에 어느 새엔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놓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도 일월의 순환은 그토록이나 무심하여 크게는 같은 모습으로, 다가가서 살펴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었다. 유한과 무한의 사이 그 어드메에서 반복되던 루미네의 나날에 객客이라 자처하는 사내가 찾아온 날은 갑작스러운 날이라 하겠다.
거대한 바위를 연상케 하는 풍채를 지닌 사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땅의 표면을 유연하게 스치며 비죽이 솟아오른 풀잎 사이를 미끄러지는 뱀을 떠오르게 하는 눈을 지닌 기묘한 사내. 그는 종종 루미네가 모든 것의 시발점始發點에 대해 질문할 적에, 우연偶然에 의해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나직이 대답하곤 하였다. 종종 한숨 같은 숨결로 세상의 이치理致를 읊조리곤 하는 사내. 모든 것은 천리에 의해 부여된 인과의 베틀 아래 짜여지는 직물織物이며 가끔씩 여신의 철저한 의도 아래 새로운 문양이 직조織造되기 시작할 때의 그 처음 매듭이 바로 ‘우연’이라 불리는 것이리라고, 어쩌면 조금은 무언가를 견뎌내는 듯한 목소리로 시를 읊듯 속삭이는 목소리.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하늘 아래 만물은 모두 세상의 객일지도 모르겠네.”
설핏 눈가를 찡그리며 미소 짓던 그의 말이 루미네의 귓가를 둥둥 울리며 그녀의 가슴께로 파고드는 새벽녘, 둘은 높이 뜬 달 아래에 놓여있었다. 진정으로 어디서든 객客일 수 밖에 없는 그 자신과 잃어버린 형제가 떠오르는 밤이었으니, 침잠하여 내려앉은 어둠 위로 달빛이 내리쬐어 강 위로 자신을 밝혀내고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그가 자신을 그저 세상을 떠도는 객客이라고 소개한 뒤 꼭 열 번째 만남을 가졌을 때라.
같은 꽃봉우리 내에서 몸을 웅크리고 키득대며 덧없는 농弄을 던져 대던, 자신을 꼭 닮은 모냥의 눈을 지닌 쌍둥이 형제. 컴컴한 어둠 속에서 저보다 단단하고 각진 몸의 가슴에 얼굴을 꼭 대면 느껴지던, 흉부胸部의 오르락- 내리락- 오르락- 내리락-하는 움직임. 고요한 숨소리와 덜컹거리며 뛰는 심장의 박진력迫眞力만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루미네의 심장께와 귓가를 파고들던 그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손 끝의 실처럼 걸릴 듯 걸리지 않아 이제는 놓쳐버린 인연因緣의 실타래였으니. 루미네는 그 대신으로 미련과 후회 그리고 열망을 머금어 붉어진 적삼赤衫의 끝자락으로 어둔 밤하늘에 새겨진 달을 쓸어보고는 하였다. 그를 앗아간 백발의 여인을 향한 원한과 증오는 시뻘건 응어리로 뭉그러진 채 뱉어 내진 박동하는 심장이 되고는 하였으니. 그것은 꼭 능소화를 토해낸 것 마냥 아름답고 처절한 붉은 빛을 띤다 하겠다. 매번 달이 팔을 짚고 반쯤 고개를 괴어 태양과의 교대를 가늠하는 축시의 끝자락에서, 일년에 단 하루 허용되는 그 거짓된 자유의 끝물에서, 루미네는 절규하였다. 피를 토해내듯 울부짖는 그 절규가 백하고도 수십 번 더 반복되었을 때에, 그제서야 루미네는 그 수를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루미네는 아직도 그러한 절망이 수백번은 더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 직감하여 입술을 짓씹으며 체념하던, 그 처절한 추락의 순간을 망각妄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예상과는 다르게도 그러한 절망은 기이한 사내를 그 배경에 더하는 것으로 변형되어 반복되어 왔을지어니. 그 또한 운명運命의 농간弄奸의 일환이라 하렷다.
처음부터 그녀가 ‘그 객’을 환영한 것이 아니었음은 명명백백明明白白하다. 처음에는 그 자신의 절망의 곡소리에 귀가 멀어, 다음에는 그녀를 조롱하듯 눈부신 달빛에 눈이 멀어, 그리고 그 뒤에는 살랑이며 불어오는 북서풍에, 징-하고 울리며 코끝을 점령하는 월하미인月下美人의 향기에 코가 막혀 그를 알아채지 못하였었다. 사실 어쩌면 그 존재를 피부로 지각知覺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내색할 만큼의 여유와 덤덤함을 지니지 못하였기에 그 모든 감각이 버석한 모래와 같이 굳어져 바스라져 내린 것일지도 모를 터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시간은 흐르고, 선인장에 매달린 외로운 꽃이 열리고 닫히길 반복하면서 그녀의 강렬한 감정도 차차- ‘모든 것은 마모되어 간다는 그의 말’에 따라- 아주 조금씩은 마모되어갔고, 그녀 옆의 객을 바라볼 말미가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를 자각한 첫 번째 순간에는 자신들의 날개가 부벼지며 그 조각들이 반짝 빛나며 내려앉는, 분말粉末을 노리는 치인가 하여(이 세계의 존재들은 그것을 요정 가루라 부르는 듯하다) 이를 득득 갈고 날개를 마구 비벼 문지르며 요란한 소리를 내어 그를 내쫓으려 하였다. 뾰족하게 갈려 나간 송곳니에 여린 팔뚝살을 문대어 길게 상처를 긋고, 가늘게 흘러 달빛에 반사되어 은사마냥 반짝이는 투명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그르렁거리며 그의 주위를 빙빙 배회徘徊하던 루미네였으니. 몇 시진을 그렇게 허비하고는 다시 꽃잎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순간에는 그토록 지겨운 저주를 사내에게 퍼부을 수 밖에 없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그 기묘한 사내는 아랑곳 않고 돌처럼 그 자리에 굳게 발을 펴 내딛어 서서, 묵묵히 그녀를 응시凝視할 뿐이었다. 그녀가 그의 곁을 벗어나려고 날개를 높이 펴고 날아올라 공중을 떠돌아도, 어느 순간 다시금 그녀를 향한 시선에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는 경험을 빈번히 해댄 루미네는 어쩌면 점차 지쳐갔고 무뎌져 갔다.
십 수번 열어 젖힌 꽃잎서 육 척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그 사내가 어김없이 루미네의 곁을 공공연히 맴도는 괴기로운 행동을 보여왔다. 세월이 만들어 내는 것은 마모磨耗와 무뎌짐 뿐 아니라 인연의 실의 새로운 매듭이라고도 할 적하니, 그러한 되풀이 속에 더해지는 것은 익숙함이오 덜어지는 것은 경각심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멈추고 날개를 부닥쳐 자글거리는 위협을 행하는 것도 정지停止하였다. 서로의 존재를 피부의 표면에 솟아난 돌기를 통해- 창공에 널리 퍼진 서로의 무게감을 통해 느끼면서도 서로가 각자를 없는 존재로 여기기도 십 수번. 마침내 루미네가 공기 중을 메우는 그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
“… 당신은 누구인가요?”
오랜만에 벌려낸 입안의 속살을 뚫고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에 반해 사내는 갑작스레 던져진 질문-어쩌면 확인-에도 당황치 않고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그저 세상을 떠돌고 있는 한낱 객에 불과한 자라네.”
감춰지지 않는 품위, 묻어나는 권위. 사내의 자연스러운 하대와 기품 있고 우아한 학과 같은 몸짓, 그리고 잔잔하고도 고귀한 목소리. 그 모든 것에서 사내의 고상高尙함과 현명賢明함이 새어 나왔으니. 하지만 그는 루미네가 정작 물은 것은 알려주지 않았으며 루미네가 던져 내놓은 속마음의 겉 껍데기에 대한 대답만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루미네는, 또 다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미끼를 문 물고기의 수순이 버둥거리며 점차 더 그 미끼를 깊이 씹어 삼키는 일이듯.
“… 왜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나요?”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그의 입꼬리가 살풋 달을 향해 솟고- 그는 잔잔히 미소지으며- 짧은 몇 문장을 지긋이 건네 주었다.
“무궁히 스쳐가는 자네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그 끝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해 두겠네. 오랜 세월을 지내온 자가 갖는 욕심을 부디 양해하시게.”
그 오만傲慢한 대답은 루미네의 검 붉게 응어리진 심장을 적시고 혈관 속으로 타고 흘러-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위안이 되었다. 자신 조차도 이제는 작게 조각나고 또 조각나 부스러져 그 끝을 보기 위한 관조觀照의 자리에 서있을지 모르니. 그 와중에 당당히 자신을 관찰하겠다 말하는 사내의 존재는- 루미네를 오랜 고독孤獨에서 해방解放시켰기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저 오래 지속된 홀로 맞는 새벽과 외로움이 주는 한기寒氣가 그녀의 심장을 둘러싼 혈관까지 파고들어 그저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필요하게 만들었기에 이미 그녀는 위로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 정답이던, 그녀는 그의 대답이 꽤나- 아니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여 루미네의 암묵적 동의 하에 그 사내와의 동행이 시작된 것이다. 루미네가 전속력으로 공중을 질주하여도 사내는 지친 내색 하나 없이 무감하게 땅을 박차 달리며 그녀와 동행하는 것이었다. 과거 이 세계世界에만 존재하는 꽃들의 권속眷屬들에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의 형제의 행방을 물었을 때는 큰 소득을 얻은 바 없다. 하지만 사내와 동행하기 시작한 후에, 그들이 사내의 존재를 눈치 채면 그들은 훨씬 협조적으로 변하였다. 이전에는 짧은 시간만을 지닌 루미네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거나 잠들어 있어 응답하지 않던 꽃들도 그 앞에서는 고개를 넙죽 굽히고는 성실히- 또 순순히- 아는 것을 말해주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꽃들이 그 부모의 꽃술에 매달렸던 씨앗에 새겨진 흔적으로 전해온 이야기들- 구전을 통해서 그녀의 형제를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세계를 떠돌 수 있던 꽃의 권속들과 그를 막아낸 백발의 여신. 그것은 꽃들 사이에서도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던지, 전설로서 전해지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렷다. 다만 그것은 어떠한 구전이 그러하듯 부풀려지고 방향이 뒤얽혀, 쌍둥이의 키가 팔 척에 달했다던지, 그들이 서로 몸이 반쪽씩 붙어 각각의 몸에 붙은 한 쪽씩의 눈알을 앞뒤 좌우로 회전해대는 괴물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던지 하는 식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와중에도 백발의 여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머릿결을 지녔었는지가 끝없이 강조되었다는 바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끔씩 밤에 피는 등불 꽃이 전해주었다는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의 반짝임과, 그리고 세실리아 꽃들이 강조하는 폭포 같은 굽이침을 모두 지녔다는 그녀의 머릿결. 그것을 언급할 적에 꽃들은 눈을 빛내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아득 갈아 대고는 했으니. 그것은 필히 나비를 끌어 모아야 하는 장미들의 질투이자 동경일지어니.
필히 축시의 끝자락에 증오해 마지 않는 꽃잎 사이로 몸을 뉘여야 하는 루미네는, 어쩔 수 없이 한정된 거리를 이동해 왔다. 더 나아갈 듯, 나아가지 못하고 몸을 돌려 다시금 알싸한 향을 따라 길을 옮기면서도 계속하여 흘끗 흘끗 등 뒤의 풍경을 눈 안에 담아내던 루미네였다. 그런 그녀를 잠잠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 사내는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의심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을- 제안을 건네 왔다.
“세월을 여행하는 자여, 혹시 나의 도움이 필요한가? 자네가 나를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에 응답하겠네. 하지만 잊지 말게, 무언가를 요청한다는 것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 것임을 알고 있으시리라 생각하는데요.”
도무지 사내가 자신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추측推測할 수 없던 루미네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자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자 사내가 싱긋 미소 지으며 여유롭게- 미동조차 없는 바위의 여유로움으로 응했다.
“나를 향한 자네의 염려가 귀에 달고 마음에 차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정하는 것은 나의 몫인 것을. 계약의 내용을 조율하고, 그 대가를 정하는 것은 계약의 정수이자 꽃. 그 향을 음미하는 즐거움은 나의 몫으로 남겨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네.”
그리고는 언제 다정한 낯으로 웃었냐는 듯 다시금 그 조각과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서는 나직하게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자네가 만약 이 계약에 응한다면 나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자네를 도울 것을 감히 약조約條하겠네. 계약은 자네가 자네의 형제를 찾을 때 까지 지속될 것이며, 내가 바라는 대가는 자네가 원하는 바를 달성한 후에 지정하도록 하는 것으로 하지.”
평소 ‘계약’의 형태를 접해보지 않은 루미네였으나, 그녀는 단박에 이것이 얼마나 불리한 계약인지 선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잘못된 장소에- 이를테면 바위 위로- 내려앉을까 불안에 떠는 씨앗의 본능적 공포에서 비롯된 것일 지니. 이를테면 그것은 씨앗의 어머니의 어머니- 즉 태고太古부터 시작되었을 경계심의 발로일 것이다. 하지만 씨앗은 그저 바람에 몸을 싣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의 무력한 운명運命이라. 루미네는 그 섬뜩함에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그저, 그저 자신의 앞을 굳건히 가로막고 있는 종려를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와 그의 태생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잃는 것이 익숙한 자와 다스림이 익숙한 자의 간극間隙일터이니. 루미네가 작은 몸짓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자 그 사내는 다시 싱긋 웃더니 커다랗고 단단해 보이는 손을 내밀었다.
“흠… 조금 늦은 인사인 듯 하네만, 나는 종려라고 하네. 그간 미리 이를 말하지 못한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네. 용서하시게. 그 또한 계약으로 얽혀 있는 문제였기에 섣불리 언급할 수 없었다네. 이제 계약이라는 신성한 준칙準則에 묶여 동행同行하는 연緣으로서, 자네를 무엇으로 칭해야 할지, 자네의 이름을 묻고 싶은데… 어떠한가.”
그녀의 형제가 부르던 애칭. 그리고 잠시간 스친 여타의 권속들이 그녀의 금빛 머리를 갖고 만들어낸 호칭들. 루미네의 머리 속으로 여러가지 상념들이 마구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역시 그녀를 부르는 ‘이름’은 바로 부정할 수 없는 그것일 터이니. 어머니 꽃이 부여해 그녀의 목을 옭아매고 또 그녀를 인도하는 금빛의 올가미 줄.
“……루미네. 루미네라고 부르세요.”
그렇게 아주 작게 대답하고는, 루미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만큼이나 파들거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단단한 살결- 검지를 맞붙잡았다. 손의 크기가 워낙 다른지라 간신히 그의 검지에 손을 얹어 놓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생긴 것처럼 그의 손은 단단했으며 굵은 뼈대를 지니고 있었다. 꽉 여문 탄탄한 손에는 푸른 빛깔이 맴도는 핏줄이 흰 살결 너머로 불거져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손과 너무나도 달라, 루미네는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내 손에 큰 관심이 있는 것 같군.”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울려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랑였다. 왜인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루미네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했다. 사내는 루미네의 멀어져 가는 손을 다시금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잡아채더니, 조심스럽게 위아래로 그것을 흔들며 눈웃음을 싱긋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제 계약이 성립되었으니, 이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돌을 먹는 형벌이 내려질 걸세. 잘 부탁하겠네.”
‘돌을 먹는’ 형벌이라는 지점에서 조금 소름이 끼쳤지만, 이 세계의 상투적인 어구일 것이라 짐작하며, 루미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꿔 놓을 ‘계약’의 밤이 커다란 달빛 아래서 엄숙하게- 그러나 주위의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상태에서- 성사된 것이다.
*
그렇게 다시 ‘일 년’이 지나게 되었다.
루미네는 이 세계의 시간이, 자신이 꽃의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은 시간과 일치한다는 것을 사내와의 동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일년이, 그 기다림이 이 세계에서도 동일한 단위로 쪼개진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누군가가 자신과의 시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일하게 쪼개어진 시간 아래서도 그들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누리고 있다는 분노와 열등감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루미네는 꽃으로 돌아가야 했고, 어머니 꽃 안의 세상에서 다시금 웅크려야 했다. 지난한 시간을 보낸 후 다시금 눈을 뜬 그녀가 꽃잎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달이 뜬 가을날, 역시나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그’ 사내였다. 그는 등불 꽃의 빛을 벗삼아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유유자적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온갖 다구茶具가 올려져 있는 상은 장신인 그의 키에 맞게끔 꽤나 높아 보였는데, 상 주위를 반딧불이가 맴돌며 은은한 불빛으로 다기들의 표면을 물들였다. 유약이 덧씌워진 다기들의 몸체 위로 내려앉는 달빛은, 다기들을 묵묵하고 조용하게 번쩍이게 하였다.
“어서 오게나. 오늘부터는 약조約條한대로, 나의 ‘최선’을 다해서 자네를 돕도록 하지. 그 전에 잠깐 함께 차를 드는 여유를 즐기지 않겠나?”
과하지 않은 우아한 광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옥색의 다기 도구처럼, 너무 크지도 또 너무 작지도 않은 고아高雅한 목소리가 그녀와 사내 사이에 울려 퍼졌다.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올리는 그의 모습에 내리쬐는 달빛은 잘 다듬어진 조각을 비추듯 그의 굳건한 코 위로 내려앉아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을 남겼다. 그리고 뱀의 것을 닮은 눈. 오묘하게 덧칠해진 눈가의 문양이 그 깊이를 한없이 더하였으며, 어떠한 광석을 뭉쳐 놓은 듯 동그란 모양새로 생겨진 그 눈. 그것이 자신을 응시하자 루미네는 기이奇異한 끌림을 느껴 날개를 부지러히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그것을 마실 때가 아닌 것 같네요. 그보다는… ‘계약’에 따라 빨리… 오빠, 아니 형제를 찾는 것에… 빨리 협조해주세요.”
다급함을 감출 수 없는 루미네의 요구에 사내는 가늘게 눈을 떴다가 다시금 웃고는, 몸을 일으켜 잠시간 이미 완벽한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루미네에게 다가와 루미네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읊조리는 것이었다.
“…그래 좋아. 그럼 잠깐, 실례하겠네.”
그러더니 갑자기, 루미네의 몸체를 손바닥에 조심히 올려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검은 밤하늘을 향해 옷가지를 펄럭이며 박차 올랐다. 계속해서 풀쩍- 달까지 닿지 않을까 날아오르고는 다시 빠르게 하강하여 땅을 박차기를 몇 번 반복하자, 루미네에게 기존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이전에 멀리서 보았던 인간들의 보금자리와 전혀 다른 양식의 고즈넉한 건축물들이 가득하였으며, 곳곳에 험난한 바위산들이 삐죽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를 힘내어 덮어낸 풀잎과 나무들의 흔적까지. 사내의 손바닥에 올라타 하늘을 활강하는 동안, 발 밑의 풍경들은 속속들이 변화하였고 루미네는 그 새로운 변화에, 다시금 희망이 심장 속에 싹터 올라 거대한 덩굴로 자라나, 가슴을 꽉 움켜쥐어 쥐어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단한 가지로 이루어진 손아귀가 자신의 심장을 쥐어짤 때면, 심장이 쪼그라들었다가 다시금 그 손아귀의 힘이 풀리면 심장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래, 루미네는 아주 오랜만에 희망이라는 그 달콤한 여명黎明을 맛볼 수 있었다.
“이 곳은 리월이라고 불리운다네. 전통과 변화가 만나고, 단단한 바위와 일렁이는 물살이 맞부딪치며 공존하는 곳. 그것이 바로 리월이지.”
사내가 조곤조곤 읊조리는 나긋한 목소리가 울리고, 그가 루미네를 안아 드는 팔이 더욱 조여든다 싶더니 금세 안정적인 자세로 사내가 땅에 발을 내딛었다. 부드러운 잔디 위로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앉은 사내는 잠시간 루미네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사뿐히 땅으로 내려놓았다. 그곳에는 달빛을 받아- 푸르게 물들어 살며시 그 빛을 반사하는 한 무리의 꽃이 있었다.
“이 꽃은 ‘청심’이라고 하네. 세상의 물자가 전부 모인다는 리월에서조차도 구하기 어려운 꽃이라 여겨지곤 하지. 험난한 바위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만 자라나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 흐름을 관찰하는 존재이지. 그의 식솔들이라면 확실히, 자네의 형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새로 만나는 이 세계의 꽃. 자신의 반쪽에 대한 실마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 비틀대는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내딛은 루미네는 마침내 고귀하게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청심에 다가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청심의 권속인,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마도 흰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는, 푸르른 달빛 아래에서 보랏빛과 푸르른 빛깔 어드메에 끼어 있었다. 그녀의 날개 또한 루미네의 것과는 사뭇 달라서, 불투명한 날개가 층을 이뤄 겹쳐져 있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귀는 뾰족하게 솟아 있었으며 옷가지도 날개와 마찬가지로, 하늘하늘하며 매끈하면서도 두툼한 천으로 되어있는 -추후에 사내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것은 비단이라고 하더라- 것을 몸에 흐를 듯 걸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느껴지는 고상한 품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떼려고 했던 순간이었다. 잠시간 루미네를 응시하던 청심의 권속은,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표명하듯 달을 향해 고개를 치들었다. 그것은 루미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거절拒絶이었다. 무언가 줄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그저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하늘 향해 펼쳐 호의를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자. 그것이 바로 루미네였다. 이 땅 위의 존재들에게는 어떠한 직감直感이 존재하는 듯 하여, 무엇인가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자들을 향해서는 알 수 없는 오만傲慢과 때로는 적의를 또 부담을 느끼는 듯 하다고, 그녀의 형제에게 토로하던 절망의 탄식嘆息들이 순식간의 루미네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안다는 것과 겪는다는 것 사이에는 그녀의 체념으로는 메꿀 수 없는 거리가 있기에, 그녀가 아무리 사전에 다짐하고 또 다짐하여도 거절의 면전에서 이따금 루미네의 입안은 씁쓸해 지고는 하였으니.
그 순간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모습을 감추던 사내가, 긴 다리로 성큼 걸어 나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연스레 권위가 배어나오고 풍채風采는 훌륭하기 그지없어 그 누구라도 시선을 뺏길 만한 모양새라 하겠다. 풀 잎 위로 신이 얹어져서 나는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다시금 고개를 돌린 청심의 권속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은빛으로 반짝이는 가루들을 떨어뜨리는 날개를 열심히 흔들어서는,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군, 청심의 권속이여. 그간의 여정은 평탄하였는지 묻고 싶네만, 보다시피 우리가 좀 급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중이라… 회포를 푸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네.”
그러더니, 놀라서 토끼같이 눈이 둥그래진 루미네를 뒤로하고는 사내가 태연자약하게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그전에 먼저 소개하겠네. 여기는 월하미인月下美人 아래에 속한 그 권속, 루미네라고 하네. 부디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를 내 친히, 청하는 바이네.”
그제서야 청심의 권속-‘벽영’(이는 추후 사내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던 그녀의 이름이었다) 은 다시금 루미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재차 그녀에게도 명확한 동작으로 예를 갖추었다. 이 사내와 함께하는 여정에서는 그간 루미네가 쉬이 겪지 못한 어떠한 호의好意들을 미약한 온기로나마 접할 수 있었으니, 앞서 겪었다 한들 그 기이하고도 굴욕적인 감각은 쉽사리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루미네는 그제서야 바짝 마른 입술을 벌려내 떨리는 목소리로 날숨과 함께 물음을 뱉어내었다.
“혹시… ‘여신’이라고 불리는, 고귀하고도 사치스럽기 그지없이 반짝이는 은발의 머리를 지닌 여인을 알고 있으신가요? 아, 그녀의 힘은 아주 강력하고 무심하여 우리 어머니 꽃의 목숨줄을 단숨에, 무참히 비틀어버릴 수 있는 정도였어요. 그리고… 그 여신이 거두어 간 꽃의 권속의 행방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또 왜, 왜 그 여신이 꽃의 권속을 거두어 간 것인지도요.”
다급한 루미네의 물음을 들은 여인은 잠시간 멈칫하더니, 그 생김새 만큼이나 청아하고 대기 속 공기를 부드러운 손길로 연주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랑放浪하는 꽃의 권속이시여, 분명 어머니 꽃, 그리고 그의 어머니 꽃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說話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습니다. 파도가 굽이치는 듯한 아름다운 백색의 머리를 늘어뜨린 여신이 자신의 날개보다 아름답게 모아진 깃털로 피어나는 꽃을 시기하여 그 자의 생을 손아귀에 쥐고는 놓아주지 않는다는, 그러한 이야기들 말이에요. 하지만 그 여신이 정말로 실존하는 존재인지, 또 그녀가 거두어간 꽃의 행방과 같은 것들은 알 수 없답니다. 아시다시피 입에서 입으로- 혈관에서 혈관으로 전해지는 피는- 묽고 탁하며 그것의 존재는 대를 거치고 거치며 때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희미 해져가고는 하니까요.”
결국 여인이 우아하게 던진 말은, 루미네가 찾아 헤메는 것에 대한 그 어떠한 정보도 전해주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아, 익숙하고도 원망스러운 절망絶望이여. 하지만 또 한편 그것은 반가운 것이기도 하였으니. 어쩌면 루미네는 그 절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일지도- 모를 바이다. 입안에서 나는 불행의 쓴 맛이, 그 허탈함과 우울이 주는 익숙한 향취에 루미네는 어쩌면 조금은 아니 확신에 차 깔깔거리며 웃고 싶어 지는 것이었다. 그토록 불행은 중독中毒적인 것이니. 루미네는 불행의 달빛을 향해 날개를 힘껏 비벼서 날아오르는 것일 터. 미처 막아내지 못한 비소鼻笑가 루미네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로 새어나왔다. 그것은 진실로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커다란 절망에 대한 환영인사이자, 죽이고 또 죽였다고 생각하였던 일말의 희망을 다시금 품어낼 수 밖에 없던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기도 하였으니. 한번 비죽이 새어 나온 웃음은 참을 수가 없어서 루미네는 그만 깔깔거리며 웃고 말았다. 눈물을 흘려가며- 날개를 바르르 떨어대어 반짝이는 노란 가루들을 마구 흘려 대며.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루미네가 한참을 웃는 동안 그 웃음에 대해 일절 반응하지도,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웃음이 그쳤을 때, 온몸을 쥐 뜯으며 고함지르는 루미네의 손을 사내가 조심스럽게 막아내었다. 그 미적지근한 온기가 위로의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떠한 예의 상의 행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그날 밤, 루미네는 홀로 몸의 날개를 쥐 뜯어가며 풀 숲 위를 구를 수는 없었다.
*
그러한 절망의 밤이 지나고도, 또 다시 그녀의 어머니 꽃-월하미인月下美人은 가을의 한 가운데에서- 나무들이 색색들이 자신의 잎을 물들이는 순간 사이에서- 아가리를 벌려 루미네를 토해냈다. 반복되는 나날 들 사이에서 루미네는 사내를 통해 이 세계의 다양한 꽃의 권속들을 접할 수 있었다. 여인의 뺨에 조심히 찍어 바르는 분의 색을 띈 머리를 하고 있는 예상 꽃의 권속. 그는 아주 친절했으며 말하는 내내 웃는 낯을 띄고는 사근사근 답을 하였다. 그는 친절하였으나, 그와의 대화 내내 가슴에 무언가 끼어 답답한 이질감을 주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었다. 졸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사내를 아끼고 따르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절운 고추’의 소녀. 대화 내내 하품을 멈추지 못하고 졸린 눈을 부벼 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퍽이나 귀여운 모양새였다. 루미네는 그녀의 어머니 꽃보다도 투명하지만, 달빛을 반사해내는 별과 같은- 즉 다른 것의 반짝임에 기생하여 그 아름다움을 뽐내는, 유리 백합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모두는 각각의 개성이 있고 이 세상에 대해 떠들썩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지만, 모두 그녀의 형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반복되는 절망과 아픔은 점차 그녀를 무뎌지게 하였는데, 그것이 정말로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거대하게 출렁이는 바다의 수면 아래로 깊이… 깊이 침잠한 것일지는 혹은 어쩌면 둘 다에 해당하는 것일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게 루미네와의 동행이 반복되면서, 그가 정말 ‘최선을 다하기로 한’ 약조를 지키려는 것인지 점차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해 루미네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꼭 얻은 정보를 직접 받아 적어 정리한 채로 작성하여 전달하였는데, 표면이 매끄러운 흰 빛의 천 위에 먹으로 쓰여진 글씨는 우아하고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 개중에서는 루미네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 세계만의 단어들도 왕왕 존재했는데, 그러할 때마다 루미네는 포르르 움직여 그 단어에 내려 앉아 종려 씨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그는 살며시 웃으며 나긋한 어조로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인간들의 정보는 꽤나 유용한 것이어서,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문명 또한 일 년에 단 하루, 그것도 밤에만 활동할 수 있던 루미네에게는 즐겁기 그지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고풍스럽고 매끄러운 결을 지닌 청금색 비단, 그리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마저 아름다운 우아한 다기. 종려 씨의 소매자락에 숨어 고개만 내밀어 구경하던 ‘리월’의 떠들썩한 밤거리. 음식을 조리하여 그것을 섭취하고 배설하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없지만서도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인간들에게서 눈을 뗄 수조차 없던 경험들.
각각의 소원을 담아낸 능소화 빛의 '등' 들이 하늘에 가득 띄워져 달빛조차 가려대는 풍광. 살면서 고개를 치켜올려 보았던 하늘의 색은 늘 묵직하게 내려앉아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었는데- 둥그런 달이 루미네의 머리 위를 언제나 따라다니며 그녀를 감시하던 감옥 같은 것이었는데- 알아채지도 못한 새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알아채지도 못한 새 다가온 종려 씨는 저 등들의 빛깔이 바로 아침 노을 빛이라 말했다. 소원을 담아 띄워 보내는 것이야. 소원은 바꾸어 이루는 것이니까 제일 먼저 달밤을 일출 빛으로 물들인다는 기개부터 시작하는 것. 각각의 소원들이 불씨자국이 되어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그렇게 살며 처음 구경하는 색채의 모음. 종려 씨가 나눠준 등을 불자 가볍게 날아가는 감촉. 살면서 자신보다 더 가볍게 훅 날리는 감촉은 정말이지 그녀에게는 처음 느껴본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그때 종려 씨가 옆에서 되새겨준다. 간절히 소원을 빌며 날리면 돼. 높은 곳에서 울려오는 잔잔한 목소리, 그 다정함과 달콤함. 그에 루미네는, 등이 그의 손끝에서 떠나기 직전에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아 그래, 소원. 소원이라면 아이테르. 아이테르를 찾게 해주세요. 그래요 처음 불빛도 아이테르를 위해. 그렇게 타들어가는 소원으로 눈이 부시던 그날의 밤. 날아오르는 소원들의 색은- 온화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종려 씨의 눈동자를 닮아 있었다.
아침노을의 색이 그녀의 망막網膜에 담기게 된 이후, 그녀는 종종 종려 씨의 눈에 대해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몸서리 쳐지게 되는 것이었다. 왜 나는- 그 노을 빛을 보며 아이테르의 눈동자를-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는 투명한 노오란 빛을 왜 상상하지 않았지? 그럴 때마다 루미네는 애써 자신을 위안하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등불의 색이 너무나도 진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누군가의 염원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어쩌면 아이테르가 비운 자리를- 종려씨를 통해 메워내고 있을 뿐이라는 위안. 그러나 그것이 위안이 되었는가? 그녀가 정말로 종려 씨로 아이테르를 대체할 수 있었는가? 그러한 질문은 그녀의 수면 아래로 침잠하여 계속- 계속하여- 조용히 고여가기만 하였다.
종려 씨가 가지고 온 인간들의 정보들과 문물들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꽃의 권속들에 대한 오해들이 점철된 속설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요정’들을 잡아 산채로 날개를 뜯어, 백 쌍의 날개로 명약을 지어 마시면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던가 하는 기괴한 내용들. 작고 아름다운 ‘요정’,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요정’, 꽃의 권속을 설명하는 인간들의 언어는 이상하게도, 루미네에게는 치욕스러운 것으로 느껴졌다. 왜인지 요정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을 볼 때, 또 때로는 종려 씨의 목소리를 통해 그것들을 듣게 될 때면, 심장께에 이상한 불편감이 꿈틀 자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소리들은 몇 백년의 세월과 세계를 거쳐온 루미네에게는 지나치게 익숙한 것이라- 그녀의 마음 속을 스치고는 순식간에 지나가곤 하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종려 씨가 읊어 준 단 한 문장, 그 한 문장은 그녀의 머리 속을 빙빙 맴돌며 끝까지 그녀의 바다의 한 모퉁이에서- 파도를 불러 일으키며 철썩- 철썩- 주위의 바위를 두들기고는 거품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요정들은 몸이 작아서, 한 가지 생각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그 바보 같은 속설.
돌이켜보면, 아이테르를 잃은 루미네의 ‘자그마한’ 머리 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다운 리월의 경치 속에서 종려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조차. 함께 밤 하늘을 걸으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경험을 할 때조차, 또 다른 꽃들의 권속들과 나누는 농담 한 마디 안에서도 그녀에게는 아이테르- 그가 곳곳에서 숨쉬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루미네는 존재하지 않고, 그를 찾는 루미네- 그와 함께했던 과거의 편린의 루미네만이 잔상으로 남아 그녀를 가득 메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어쩌면- 희망조차 모두 잃고, 그저 이제는, 이제는 정말 의무감에 그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아이테르를 찾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무엇이 되는 거지? 나의 영혼의 반을 이루었고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점령해버린 그를 잘라 도려낸다면- 도무지 나는- 무엇이 될지 자신이 없어-. 달을 삼키고 빛을 뿜어내는 호수의 표면을 바라보며, 그녀의 쌍둥이 형제와 닮은 꼭 닮은(정말 그러한가?) 얼굴이 있는 그 거울과 같은 수면을 보면서 루미네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그녀가 조그마한 체구를 지녔기 때문에- 생각이 들어찰 공간이 부족해서인지, 그녀는 정말이지 그의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아이테르를 찾자. 우선 그것만 생각하자. 모든 문제는 그 후에, 그 뒤에 생각해보자. 뒤로-, 그 뒤로-…
*
종려 씨가 나타났던 것처럼, 루미네가 그토록 바라던- 혹은 바라지 않던, 모든 것을 다시금 바꾸어 낼 변화는 한 순간에 닥쳐왔다. 손가락을 빨던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 달음박질을 하고 다시금 허리가 꼬부라져 이가 다 빠져 손가락을 쭉쭉 빨기까지, 그녀와 그가 지냈던 백여 일의 나날들 안에서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변화의 서막이- 그 어떤 예고도 없이 개막한 것이다. 아이테르를 빼앗겼던 날도 꼭 이러했었다. 그 순간에는 앞으로의 모든 것이 변화하게 될 것임이 다가오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던 순간. 너무나 놀라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덩그러니, 덩그러니 그의 손을 놓친 채로 가만히 서있던 그 순간. 놀라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덩그러니, 덩그러니 그의 손을 놓친 채로 가만히 서 있던-. 구걸하듯이 텅 빈 손을 벌린 채로 가만히 그의 귀환을 기다렸던 그 순간. 그러나 기적은 쉽사리 찾아오는 법이 없으며, 불행마냥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래 그렇게 모든 것을 바꿔버린 시간을 조각조각내 쪼갠 그 찰나라는 조각이, 다시금 루미네의 핏줄을 타고 혈관에 녹아든 것이었다.
그래, 처음 시작은 종려씨가 고문헌에서 여신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리월의 고즈넉한 벌판에 가득한 지하 유적들에 그녀의 존재가 서술되어 있다는 기록. 그리하여 떠나게 되는 유적으로의 탐사. 그 어느 때보다 아이테르와 가까워진 루미네의 노오란 눈동자에는 방금 피어난 불빛의 그것과 같은- 타오르는 반짝거림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루미네의 날개에서 사르르 떨어져 내리는 가루보다도 더욱 반짝였으며, 유리 백합이 달빛을 반사하는 찰나의 순간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아름다웠다. 그들의 존재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 그것을 넘어선 루미네의 갈망은- 루미네를 정말로 달빛에 기생하지 않고도 빛이 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반짝이는 루미네조차도 한 순간에는- 종려 씨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고개를 돌려 흘끗 확인하는 것은 잊지 못하곤 하였으니. 하지만 그래, 태양만을 바라보며 파도치는 절벽 아래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존재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으니, ‘종려’ 조차도 흥미를 가질 법하다고 할 법하다.
어두컴컴한 지하 유적의 입구로 들어서면서 점차 시야는 제한되어 갔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미약하게 빛을 내는 것은 루미네의 날개 가루 뿐이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루미네를, 종려 씨의 부드러운 음성이 막아세웠다.
“여기서부터는 공간을 밝힐 만 한 것이 필요하겠어. 루미네, 잠시 기다리게.”
그러자 종려 씨의 손바닥 위로 빛나는 사각형 모양의 복잡한 형태를 지닌 구조물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위 조각들이 각각의 틈에 꼭 맞게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 바위들 위로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지하의 공간을 환하게 밝혀 내었다. 루미네는 이리 저리 공중을 맴돌며 앞으로 나아갔다. 섬세하게 조각되어있는 돌들이 층층이 쌓여서 만들어진 유적이었으나 그조차도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는 없었는지 돌 틈 사이로 진녹색의 이끼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루미네는 그녀의 작은 날개를 계속해서 힘차게 흔들어 대며 날고 또 날아대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혼을 갈아내 만들어졌을-그것도 루미네의 몇 십 배 크기의 인간들의 것 일터인데- 유적에서 루미네가 나아갈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웅장함 속에서 스스로를 불타오르게 하는 불나방의 날갯짓 같은 루미네의 날갯짓은- 그저 미미한 것일 뿐이었으니. 설상가상으로 누군가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라도 있는 것인지 유적의 길은 마치 미로처럼 꼬여 있었다. 루미네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웅장함을 지닌 문. 그 문은 루미네를 약 올리듯 계속해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이러다간 다시 축시의 끝이 되고 말아.’
축시의 끝에서는 반드시 어머니 꽃 안에서 몸을 웅크려야만 한다. 그것은 루미네의 규칙. 루미네의 일부. 루미네를 채운 숨결의 조각. 루미네의 모든 것에 낱낱이 파고들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풀 수 없을 실. 그 어디의 어떤 사내는 실을 풀어내어 미로를 짚어 나간다고 하던데, 루미네의 실은 그녀의 몸을 칭칭 매어 싸 그녀의 요동치는 심장 박동마저 옭아매고 있었으니. 마음이 급해진 루미네는 계속하여 같은 자리를 맴돌고- 또 맴돌았다. 누군가 그녀를 약 올리듯 만들어 놓은 미로 안에서. 반복되는 그녀의 실수에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종려 씨는 그녀의 실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마냥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킬 뿐이었다. 정신 없이 같은 공간을 맴돌고 또 맴돌던 그녀는 어느 순간 실이 끊어진 목각 인형이 픽 무너지듯 멈춰 섰다. 아- 이제 시간이 된 것이다. 점점 숨은 가빠지는데도 쉬지 않고 날개를 놀려 밖으로 나아가는 루미네를 바라보던 종려 씨가 살풋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금 그녀의 몸을 부드럽고 능숙하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큰 보폭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서 금세 달빛이 내리쬐는 밖으로 척척 걸어 나왔다. 종려씨의 길쭉한 손가락들의 틈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고아한 달빛. 그 빛이 유독 설웁게 그녀의 동공瞳孔에 와 닿는 날이었으니.
*
‘그 문’을 지나는 데에는 꼭 30년이 필요했다. 꽉 다물리듯 빈틈없이 들어맞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 문이었으나, 그를 구성하는 석판들 사이에는 은근한 틈들이 숨어있었다. 미로 같이 얽혀 있는 회랑들에도 독특한 무늬가 음각陰刻된 조각들이 구석에 은밀하게 놓여있었다. 유적의 내부에는 여러 잔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 조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연유는, 그럼에도 각각의 방에는 작은 동물의 모습을 한 조각상들이 있었고 그 조각상의 시선이 모이는 공간에 그 조각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리라. 조각을 나르고 그것을 문 틈에 끼워 넣는 과정은 모두 종려 씨가 도와주었다. 루미네가 답을 갈구해 그것을 찾으면 종려씨가 실행을 도맡는 방식. 아마 혼자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었을 일들. 그녀의 결핍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그러한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존재였으니.
그렇게 넘어선 문 너머는 아롱아롱한 촛불들이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루미네의 코 끝에 살랑 이는 바람이 소슬히 불어와, 그가 담고 있는 꽃 향기가 잠시간 코 끝을 간지럽히는 듯 했다.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꽃의 부름이 느껴지는 것에 잠시간 의아했던 루미네였으나 그녀의 빛에 한걸음 가까워졌다는 직감에 금세 그것을 잊고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금 어떠한 수수께끼에 마주치게 되었다. 그곳에는 물이 가득 차올라 고요히 고여 있는 구덩이 같은 것이 존재하였다. 웅장하여 그 크기만으로도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드는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불빛마저도- 그 구덩이의 깊이에는 닿지 못하여 그 아래에는 끝없는 어둠이 존재하였으니. 그것은 꼭 심연을 닮아 끝없이도 루미네의 내면을 파먹어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미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심연에 몸을 던지는 것뿐이었으니. 그녀는 다시금 기꺼이 어떠한 수수께끼에 자신의 작은 몸을- 그리고 그 반짝이는 날개를 조각까지 내던지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루미네는 다시 한번 그녀의 질곡桎梏을 맞이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오랜 기간을 날고 또 날아도, 아이테르를 향한 이 관문關問은 몹시 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기묘한 것이라면 반드시 발견해야만 해.’
흔히 보이는 유적의 통로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어떤 점에서 특이한 지점을 발견해낼 수 있을까? 주변을 꼼꼼히 관찰하고 또 생각한 끝에 루미네가 발견한 것은 몇 개의 작은 기둥들이었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종려 씨의 불빛에 가려져 있던 빛이 기둥들의 무늬들 사이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기묘한 불빛들에는 꼭 오묘한 문양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전에 거대한 문에 새겨진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세워진 마름모 모양으로 불빛이 희미하게 내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빛이 없는 부분이 서로 얽힌 모양새는 꼭 길이 뻗어 나와 있는 것처럼 보여 마치 미로의 지도 같은 모양새로 보이는 문양이었다. 기이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문양. 루미네는 그녀의 작고 새하얀 손으로 일일이 기둥을 더듬거려서 기둥의 윗부분에 어떠한 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울퉁불퉁한 돌의 표면에 긁히고 쓸려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나 쓰라림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루미네는 주변의 널린 돌 들에서도 같은 문양 새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루미네는 애달픈 희열을 느끼면서 종려 씨에게 부탁해 그것을 날라 기둥 위의 틈에 끼워 넣어 보았다. 그래 모두가 그러하듯 루미네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에게 닥쳐온 돌풍에 맞서려고 하였다.
하지만- 종려 씨의 부드러운 손길로 그 돌이 모두 얹어지고 나서도 그 호수에는 아무런 반응이 존재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루미네는 그 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 한번 길을 굳게 정하고 나면 그것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걸을 수는 없는 법일 터니. 수십일이 꼬박 지났음에도 그녀의 사고는 변화할 줄을 몰랐다. 같은 공간을 맴돌고 또 맴돌다가 여린 손으로 벽을 박박 긁어 대며 어떻게 든 길을 만들려는 루미네의 손을, 종려씨가 다시금 부드럽게 낚아 채고 몸을 돌려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유려流麗하고 다정하게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루미네, 이 기둥들은 호수에 놓인 저 기둥을 기준으로 하여 동, 서, 남, 북에 퍼져 있는 것 같네. 혹시 이번 관문에는 문양이 새겨진 돌을 놓는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어찌 생각하는가?”
그제서야 누군가 루미네를 감전시킨 것처럼, 짜릿한 전율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이토록 간단한 답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순식간에, 그녀는 과거의 자신이 참으로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눈에, 호수 건너편의 벽이 들어왔다. 그 벽의 꼭 중간에 있는 돌에는 어떠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생각이 굳는 것은 이토록이나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인 법이다. 과거의 자신이 조급하여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는지를 생각하면서, 루미네는 호수 위를 날아서 건너가 그 돌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돌의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언가 반복되는 것도 있고, 변형되는 것도 있게끔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데, 불쑥 그녀의 등 뒤 높은 곳에서 종려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이것은 아주 오래 전에 사라진 문명의 사어死語일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여. 고개를 들어 떠오르는 여명黎明을 응시해야 할 터이니. 그러나 여명黎明에는 반드시 달이 기우는 새벽이 필요할 터이다.’ 이렇게 적혀 있군.”
순서. 순서. 만약 순서를 이 문장에서 읽어내야만 한다면. 동, 서, 남, 북으로 놓여있는 기둥들과 여명, 그리고 새벽. 어떤 것을 이 문장에서 얻어낼 수 있을 것이며, 무엇을 해야만 할까? 루미네를 이끌어온 모든 경험들이- 그녀가 ‘답’을 생각해내는 데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른 하늘을 바라본 경험. 그리고 그 달이 점차 기울어가는 모양새를 아이테르와 함꼐 바라보던 그녀의 순간들. 손을 마주 잡으며 푸른 달빛 아래를 웃으며 날던 그 찬란하던 순간들. 그리고… 그리고 종려 씨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그 틈새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들. 그때 달빛이 어디로 기울고 있었지? 이 세계의 달빛은 어떻게 고개를 괴며 땅으로 꺼지고는 하나? 그래 그것은 아마- 종려 씨가 알려준 밝게 빛나는 서쪽 별을 기준으로 한다면, 분명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는 것. 그리고 그녀는 이후에 돌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계속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자각했다. 한번도 해가 뜨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자신. 아니 해 자체를 바라본 적 없는 그녀. 그녀의 삶에서 ‘해’라는 것은 그 그 눈부심을 어설프게 박제한 거짓 흉내들 뿐이었으니. 그녀가 맛볼 수 있는 것은 산산이 조각난 껍데기 뿐이었다.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자 환상의 존재. 그리하여 한없이 빛나기에 가루로 부셔져 내릴까 공포심을 갖게 하는 존재. 종려 씨가 맛보여준 그의 눈동자를 닮은 불빛이 혹여나 녹아내리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고 말아, 그리하여 미지의 반짝임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것. 날개를 파르르 떨던 그녀는 조용히 등 뒤에 서있는 종려 씨를 응시했다. 다정히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 아 어찌 되었든 그녀는 아이테르를 찾아야만 한다. 떨리는 입을 열고, 루미네는 그녀의 일부를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종려 씨. 해는 어디로 떠올라 어디로 저무는 건가요? …그것은 어떠한 모양새로 기울어 어둠과 빛 사이를 오가고 어떤 모양새로 스스로를 밝혀내기에- 모두의 눈을 찌르며 그 존재를 과시하면서도 그것이 아름답다고 경배 받는 것인가요?”
한 번 둑이 트이면 그 새로 거센 물길이 휘몰아쳐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한번 그녀의 조각을 뱉어 내니, 그것은 어쩌면 조금은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변화하는 것은 이토록 어렵고도 쉬운 일이니. 그러한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던 종려의 눈이 사르르 휘었다. 어쩐지 그 낯이 요사스럽다는 생각을 잠시간 품었던 루미네는 귓가에 들려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친애하는 나의 벗, 루미네. 오만하기 그지없어 더없이 아름다운 태양은 절기에 따라 다른 곳에서 피어나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저물어가지. 자네의 계절인 가을에는,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하루의 끝을 맺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겠군. 그리고… 그 태양의 빛, 누군가의 염원들이 모여 빛나는 찬란한 그 빛은 자네가 직접- 자네의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겠군.”
“… … 하지만 저는 축시가 끝나기 전, 어머니 꽃에 …돌아가야만 해요.”
갑작스레 그녀와 함께해 온 시간들을 부정하는 듯한 말에 적잖은 곤혹감을 느끼며, 그녀가 가까스로 대답을 내뱉었다. 애초에 그와 ‘계약’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그녀가 아이테르를 찾아 헤매다가 비탄에 잠겨 비명을 내지르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다 알 것이면서. 왜 갑작스레 그녀에게 아침을 맞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머리가 무언가 처리하기 전에 심장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당황이고 곤혹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한계를 옭아매고 그 욕망까지 지배하는 것인데, 아니 그것은- 애초에 루미네를 짜낸 모든 실에 촘촘히 박혀 있어, 그녀를 구성해내는 것 일지 언데. 지금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고, 왜 그것을 말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인지조차 하지 않은 듯, 종려 씨는 태연히 답을 이어갔다.
“왜 그래야 하지?”
‘왜’ 그것은 아주 기이한 질문이었다.
왜 인간은 태어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가? 잉어는 왜 부레를 메워내어 수면 아래에서 오가는가? 왜 다홍빛의 금붕어는 아가미를 벌려 물을 순환시키는가? 그래, 때로는 어떠한 것들은 그저 그리할 수 밖에는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신의 이름 아래 이유를 불문해야 하는 것. 하지만 막상 그것을 묻고 나면 되돌릴 수는 없는 것. 왜 라는 질문은 때때로 독처럼 모든 세포에 퍼져 나가 그 숙주를 죽여 버리기도 하는 것이니. 그리하여 우리는 ‘왜’를 만났을 때 본능적 불쾌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생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렷다. 그리하여 루미네는 마음 속으로 들어 닥치는 거부감에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이미 자기를 지키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존재일지도 모를 터이다. 그 ‘왜’라는 질문이 반복되는 절망과 저주의 나날들에, 그 태생의 한계 속에서 독안개와 같이 켜켜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르는 법. 그래, 그녀는 이미 그것에 대해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그녀의 작은 머리가 해냈을 지는 모르는 터이지만-
“…그냥, 그래야만 해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답은 그녀 스스로 듣기에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종려 씨는 그런 대답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계약’을 기억하나?”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자네는 곧 자네의 형제를 찾게 될 걸 세. 내 약조하지.”
아주 기묘한 말들을 늘어놓고는
“대신,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바를 따르기로 약조했었지. 그것을 지금 정하겠네. 아주 간단해. 자네는 오늘, 축시에 그 꽃에 돌아가지 않아야 하네. 그리고 나와 떠오르는 염원의 태양을 지켜보기로 하세. 그렇게 한다면 자네는, 필시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것이네.”
그렇게 그에게는 정말로 의미가 없을 무언가를- 계약의 대가로 정해 놓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듯 종려는 무표정으로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그녀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바라보게 된 그의 무표정이었다. 모든 것들이- 변화, 저항, 거부 따위의 것들-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도움 없이는 이 미로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으며 결코 그녀의 반쪽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하루, 단 하루인 거에요.”
종려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그거면 충분하네.”
*
종려는 루미네의 말을 따라, 기둥의 윗면에 파여져 있는 홈으로 차근차근 돌을 넣기 시작했다. 중간의 기둥에 새겨진 문양을 중심으로 하여- 달이 뜨는 북쪽과 지게 되는 남쪽. 그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과 서쪽의 순서대로. 쿠구궁- 엄청난 굉음이 들리더니 물의 수위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희미하게 나마- 종려의 손에 들려 있던 물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심연’이었던 것의 아래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길과 그것이 안쪽을 향하고 있는 거대한 성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둘러 포르르 날갯짓을 하며 그 입구에 선 루미네는 성문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지금까지의 유적들도 분명히 엄청난 크기였으나, 이번에 당당히 서있는 아치형의 성문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 하지만 그녀는 나아가야만 했기에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있는 종려의 불빛에 의지하며, 조심스레 그 안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으니 길을 따라 양쪽으로 곳곳에 또 다른 커다란 방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종려가 그녀의 앞으로 성큼 나아 서더니, 그 큰 보폭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길을 안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양 굴었다. 혼란스러운 루미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쩌면 그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지, 종려는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멈춰선 곳은 어떠한 나무 방문.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뒷모습에 석연찮음을 느끼면서도 루미네는 그를 뒤따라 방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리월에서 느껴지던 향취가 물씬 나는 가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용이 수놓아진 옥색 비단이 고급스러운 나무 탁자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어 고귀한 아름다움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은은한 광택을 띠는 옥색 다기가 가면에 얼굴을 가리는 수줍은 여인처럼 보일 듯- 아닐 듯 하게 자신의 매력을 보이고 있었다. 커다란 용이 굽이치며 가로질러 그려져 있고, 그 주변에 학과 기린이 그를 보좌하듯 작게 그려져 있는 병풍의 모습은 방의 분위기를 더욱 고고한 향취가 물씬 풍기게 만들었다. 벽지, 바닥의 덮개 그 무엇 하나도 헛되게 놓여있지 않았다. 각각은 모두 꼭 필요에 맞게 놓여있었으며 그 쓰임새를 다하는 하에서 아름다움을 은근한 향기로 내뿜고 있었다. 향이 강하지 않아도 나비가 끌리는 꽃과 같은 공간. 그것이 루미네가 마주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 딱 들어맞는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종려. 그는 곧바로 의자로 향해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의자에 착석하고는, 탁자위에 놓인 다기를 쓸어 내렸다.
“찻물이 적당하게 식었군, 딱 좋은 온도일세.”
그리고는 루미네에게 눈짓을 하며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잠시 앉게나.”
루미네는 무언가에 압도되어 차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불안, 어쩌면 분노, 어쩌면 원망. 그러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황동으로 제작되어 있는 그 물건은 동그랗게 맞물려 있는 것이었는데, 종려가 그것을 열자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종려는 루미네가 시계의 초침을 응시할 수 있게끔 그것을 열어 탁자에 올려 두었다.
“자, 여기서 인시의 끝이 될 때 자네는 그대의 형제를 만나게 될 걸세. 그 전에 잠깐 앉게.”
그녀는 그의 말에 홀린 듯 탁자 위 시계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슥 밀어낸- 그녀에게 맞는 사이즈의 다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침묵. 공기를 누르는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녀와 종려 사이의 대화는 항상 종려의 다정한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루미네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온통 지독히 검붉은- 응고된 감정들 뿐이었으니. 그것을 토해내듯 말하면 언제나 주춤대며 모두가 피하고는 하였기에, 그녀는 그 핏덩이를 삼키고 또 삼켜내는 일 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종려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와 말하지 않는 자 사이에는 그저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식경이 지났을까, 그녀의 온몸을 압박하던 무거운 침묵이 깨지고, 그가 잔잔한 수면 위의 호수로 돌을 던지듯 말을 꺼냈다.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아름다운 법이지. 그렇지 않나?”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종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참 잔인하게도 모두에게 변화를 불러오게 되네. 그것은 본질을 잃어간다는 의미에서 어찌 보면 마모磨耗일걸세. 특히나 이미 완성되어 잔뜩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다가 점차 손아귀에 힘이 빠지며 그것을 잃어가는 존재들에게는 더욱 그러하겠지. 하지만 말일세, 때로는 그 변화를 성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법이지. 미완의 존재가 깎여 나가 조각품으로 나아가고 그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간다면 말일세. 그렇게 깎여가는 돌 덩어리는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것일 터이니”
갑작스레 던져진 기이한 말들에 루미네는 가만히 입을 다물 수 밖에는 없었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연유緣由가 무엇인지, 그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녀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바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말일세, 조각상이 깎여가는 과정에서는 그 돌은 무수한 상흔을 입어야만 하네. 심지어 마지막으로 조각상을 완성시키는 그 망치질 조차도- 표면에 나는 상흔傷痕일 테니. 그토록 변화는 고통스럽지만 또 아름다운 것이지.”
그렇게 잠시간 말을 이어가던 종려는 다시금 침묵에 접어들었다. 루미네는 그가 한 말들을 정리하고자 노력하면서 계속 고요히 잠겨 있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또 몇 식경이 흘렀을까, 영원과 같은 침묵이 지나고 나서 종려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간이 되었군. 가지.”
종려는 자연스럽게 앞장서서는 어디론가 나아갔다. 그것은 분명히 방향을 지니고 나아가는 것이었다. 종려와 루미네가 나아가고 또 나아가 도착한 곳은 끝없는 계단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뱅글뱅글 꼬여 있는 계단 위를 날고 또 날면서 루미네는 그저 그의 넓은 어깨를 바라보며 나아갈 수 밖에는 없었다. 기이하게도 점차 그녀의 코끝에는 꽃 향기가 강하게 맴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곳은 유리가 돔 형태의 천장을 뒤덮어 하늘이 오롯이 보이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 머무르다가 일출이 시작되어 핏빛의 주황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게 된 루미네는 잠시간 눈이 부셔 두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꼭 감고야 말았다. 그렇게 눈을 감아도 검은 점의 태양은 계속해서 잔상으로 남아 그녀의 눈 안에 오롯이 존재했으니. 이 시간은 달과 태양이 교차하는 순간이오, 달이 태양의 빛에 수치심을 느껴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순간일 터니. 그녀는 이제 달이 아닌 태양의 아래 자신의 몸을 내던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돌이 된 듯 굳고 말았다. 그녀는- ‘약속’대로 그녀의 형제를 다시 만났다. 방 한가운데에 정성스럽게 돌이 된 채로 박제된 그녀의 절반- 아니, 그녀의 모든 세포에 스며들어 있는- 그녀의 형제였다. 어디선가 낮게 웃는 종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는 종려의 눈빛을 닮은, 피가 잔뜩 묻은 다홍빛이 그녀를 내리쬐고- 태양은 떠오르고. 그녀는 산산이 부셔져 조각나 바스스 무너져 내리고-
하지만 무언가를 낳기 위한 자의 없는 죽음은 얼마나 영예로운가.
그 죽음에는 냄새도 문드러짐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잉태시키심의 영광이라 할지어다.


